*선을 넘는 것

오늘은 조금 다른 길로 출근을 해보았다. 항상 같은 길만 걷기엔 재미가 없었고, 빤히 여러 갈래의 길들이 끝에서 합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길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와는 달랐던 그 길에는 오른 쪽에 쇠창살 담이 주욱 늘어져있었는데, 그 담 위로 장미넝쿨(같다)들과 이름모를 나무 줄기들이 서로 질세라 파랗게 잎사귀를 매달고 삐죽삐죽 튀어나와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잎사귀를 뽐내는 줄기들 덕분에 자연스레 그늘이 생겨 햇빛을 피해 그늘로 걸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조명등을 켰다. 집에 있는 조명등은 잘 때만 사용하는데, 보통은 자정을 가뿐하게 넘기고 1~2시쯤 잠자리에 들 때 켠다. 하지만 오늘은 밤 11시를 조금 넘겨 이불을 덮었다. 오늘 하루의 일들 중 몇 가지를 머릿속에 상기시켜보았다. 그리고선 괜한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이때 저 행동을 했으면 어땠을까. 쟤가 저런 말을 했으면 어떘을까. 상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자연스럽게 잠에 들게 하였다. 다음날에는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일어났다. 일어날 때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마음 편히 늦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에 잘 안하던 귀걸이를 했다. 귀걸이는 사도사도 끝이 없고,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디자인이 나와서 아마 죽을때까지 쇼핑할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엄청 손이 자주 가는 귀걸이가 있고, 막상 샀지만 잘 안하게 되는 귀걸이가 있다. 손이 가는 귀걸이들은 첫 번째 서랍 속에 들어있으며, 자주 안하는 귀걸이들은 두 번째 서랍에 들어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다 입고, 귀걸이를 해야 할 차례인데, 오랜만에 두 번째 서랍을 열어서 귀걸이를 골랐다. 괜히 새 귀걸이를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내가 잊고 있었던 귀걸이들이 많았다.

오늘은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보통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데, 그것도 대낮에 집에서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격상 낮에 집에 있는 날이 많이 없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밝게 형광등을 켜고, 베개를 등받이삼아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데, 좋은 향기가 날아왔다. 빨래에서 살랑살랑 섬유유연제 향과, 창문 앞에 둔 디퓨저의 향이 섞여 코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런 낮이 오래도록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꼭 하고 싶었던 낯간지러운 말이 있었는데, 뭐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했다. 걸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면서. 괜히 혼자 두근두근하며 그 말을 할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머릿속엔 그 말이 빼곡한데, 괜히 다른 말만 하다가 이야기를 마쳤다. 오늘도 못했어!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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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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