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처음에 그녀는 마냥 천진난만해보였다.

그냥 착하고 밝고 예쁜 아이라고만 느껴졌다.

하지만 추운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그녀의 감성이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천장이 낮은 카페에 앉아 마카롱과 향 좋은 홍차 위로 대화를 하며 그녀의 내면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 내내 그녀와 매일 만나 누가 들을새라 조곤조곤하게 각자의 머릿 속에 있던 주제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하루는 이 주제, 하루는 저 주제, 또 하루는 다른 주제, 또 하루는 또다른 주제.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대화의 양이 쌓이고 쌓여 산더미가 되었고,

그녀와 나는 그 산더미같은 내용들을 인지하고 소화시키는 재미를 알아갔다.


그녀는 마치 스펀지와도 같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남김없이 흡수했다.

어떤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간에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심지어 민감할 수 있거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주제들에도 애정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경청해주었다.

그녀는 경청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경청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고, 관심을 가지는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느낌이 났다.

사실 겉으로 보면 까칠한 부분도 매우 많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면 내면엔 사랑과 따뜻함이 그녀를 꽉 메우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은하게 빛나던 그녀가 상처를 받아 그 빛을 잠시 잃어버린다면 난 정말 속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상처들과, 또 내가 받았던 모든 상처들, 

그리고 내가 극복했던 방법들, 또 더이상 내 안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온갖 노력들을 그녀에게 풀어놨다.

풀어놓은 것들 중에 그녀가 하나라도 건져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열심히 그녀 앞에 풀어놓았다.


그녀는 항상 내게 좋아한다고 했다.

표현에 인색한 나로썬 애정어린 표현들이 약간 어리둥절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정말 좋았고, 내심 그녀의 마음을 지켜나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있는 감정들을 차분히 표현할 줄 아는 그녀가 나도 좋았다.

그래서 나도 그녀에게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노력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봐주었다.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고 마음이 바빠 여유가 없었던 나를 묵묵히 지켜봐주었고,

무슨 일이 있었냐며, 왜그러냐며, 말해보라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고,

내가 스스로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할 때 까지 그녀는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굳이 길고 늘어진 위로를 내 앞에 늘어놓지 않았다.

단지 진심어린 몇 마디만으로 나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었다.

혹시나 이런 내게 실망했으면 어쩌지, 왜 더 잘하지 못했냐고, 왜 더 견디지 못했냐고 말하면 어쩌지, 라고

되려 겁을 먹었던 나의 마음이 그런 그녀 앞에서 부끄러웠고, 그녀를 믿지 못했던 내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녀는 항상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성격이 급하고 빨라 허겁지겁 헤치우려고 하는 나에 비해 그녀는 상대적으로 많이 느렸다. 

그런 그녀를 처음 보았을때는 당황스럽기도하면서,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다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나니 내 마음이 편해졌고, 그녀에게서 여유를 배우고, 기다림을 배웠다.


나는 그녀에게서 소소함을 배웠다.
야망이 많았고, 욕심이 많았으며, 날카롭기까지 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은근했으며 소소함을 추구했고, 욕심부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만해도 모든 사람들의 꿈이 아마 나와 같을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를 보면서 마치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만큼의 충격과 큰 깨달음을 얻었고,
내 안에서도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녀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내 행동들, 무심코 지은 표정들, 습관처럼 말하는 입버릇, 내 성격까지.

극단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있는 나와 달리

오히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들을 그녀는 모두 기억해주고 있었다.

날 것 같은 내 모습을 알고 있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에겐 뭐든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한 손 가득 바나나를 들고갔다.

그랬더니 그녀는 내가 사들고 갔던 바나나의 무게보다도 한참은 더 무거운 복숭아들을

내게 가득 안겨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 보다도 항상 더 많은 것들을 내게 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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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http://doranproject.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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