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10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한 육교 밑에 어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둘은 우산이 없어서 마냥 먹구름으로 어두컴컴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심 속으로는 비가 그치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속 마음은 알 턱이 없었다.
머지않아 조금씩 조금씩 비가 그치고 있었고, 그 둘은 잘가라고 인사를 한 뒤,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다.

9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한 여자아이가 나름 서글픈 이별을 한 후 비를 맞으며 집에서 뛰쳐 나왔다.
가랑비여서 맞고 또 맞으면 옷이 많이 젖을 비의 양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땐 여름이였고, 감기는 걸리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감기에 걸려서 아팠으면 좋겠다는 어린 생각을 했었다.

8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한 여자아이가 교실 창문에서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을 받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친구들이 와서 엄청엄청 반가워 하면서 고맙다고 외쳤다.
곧 야자 쉬는시간이 끝날 때라서 밖으로 나가진 못하고, 연신 고맙다고, 소리친 후
친구들에게 조심히 가라고, 나중에 보자고 외치는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7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전날 과음을 해서 쓰리고 허한 속을 부여잡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해장을 위해 짬뽕이 생각나서 (사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중국집으로 향하던 중이였다.

6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한 손엔 전공책을 가득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쥐고,
모든 시험범위를 잘근잘근 씹어먹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도서관으로 향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5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그 당시 살던 집 뒤에 개천이 있었는데, 그 개천 옆으로 걸어가야 횡단보도 등
신호도 안걸리고 엄청 빨리 삼계탕집을 갈 수 있었다.
두 발엔 샌들을 신고, 땅은 고르지 않고 온통 진흙 투성이고, 때론 잔뜩 고인 물을 피하기 위해
돌멩이 위를 통통통 건너가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 손엔 우산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은 쭉 펴며 혹시나 균형을 잃을까,
균형을 잃어서 저 웅덩이에 빠지면 어떡하지,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열심히 삼계탕 집으로 향했다.

4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눈 대신 비가 왔었다. 나름 정장 차림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회식을 하려고, 직장 뒷 골목에 있었던 쭈꾸미집으로 향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우산이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보고싶은) 언니와 함께 높은 힐을 신고,
추워하며 종종걸음이지만 빠르게 굽는 냄새가 가게 밖에까지 진동하는 쭈꾸미집으로 향했다.

3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열심히 뛰어다녔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때 한 곳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었는데, 나름 느낌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건 됐겠다, 확신하고
비는 시간에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서 가게 문에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종이가 혹시나 붙은 곳은
없나, 두리번 거리며 발에 땀나도록 돌아다녔다.

2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엄마가 입원한 병원을 가기 위해 열심히 집에서 짐을 쌌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병원에는 다들 상황이 여의치 않아 혼자서 가야만 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이것저것 짐을 챙기고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집에 왔다가 병원에 갔다가,
이런 생활을 반복했다.
공교롭게도 학교, 집, 병원 모두 지역이 달랐다.
하루에 광역버스, 시내버스, 전철, 병원 셔틀버스를 모두 타고다녔다.

1년 전 비가 오는 날에는, 새벽에 눈 비비며 일어나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씻은 후, 열심히 두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거리면서 스팸 주먹밥을 만드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주먹밥에 간을 한 방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두번의 기회는 없다) 조마조마하며 소금을 탈탈 털어 넣고,
깨를 후두두두둑 뿌려서 힘차게 한 손으로 밥을 뒤섞고 맛을 봤는데, 솔직히 정말정말 맛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스팸을 열심히 굽고 밥에 스팸을 덮은 후, 구운 김으로 동그랗게 밥을 말아서 락앤락통에 예쁘게 담았다.

1년 후 비가 오는 날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다른건 바라지 않아도 내가 활짝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Hee




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http://doranproject.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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