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1. 4월의 주말 근 두 달만에 간 집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일 년 넘게 아무도 없었던 내 방은 이제 거의 창고 수준이 되어 있었고, 핸드메이드 동호회를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동생 방은 거의 공방 수준이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님 얼굴을 들여다 보았는데, 아직 예전 모습 그대로셨다. 원래 집에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나인데, 아빠가 밖에 나가서 회까지 떠오시는 바람에, 어쩌다보니 내 앞엔 꽉 찬 소주잔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항상 건강하자!'를 외치며 짠을 하고, 소주도 마시고, 회도 먹고, 먹고 싶었던 김치전도 먹고, 엄마표 김치찌개도 먹고, 내가 온다고 사다두신 딸기도 먹었다. 신기하게도 엄마가 만든 음식은 항상 엄마만의 맛이 담겨있다. 같은 메뉴를 ..
*분노 1. 2017년의 만우절 만우절답게 새파란 하늘에 해가 쨍쨍 비추고 있는 와중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것도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비를 피하려 우산을 쓰고, 따뜻한 햇빛을 쬐며, 얼굴은 평온한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즘 내 안에 '화'라는 기준선이 낮아진 건지, 아니면 정말 '화'가 날 만한 일이었는지, 사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냥 조금만 이렇게 하면 어땠을까, 조금만 저랬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나'라는 존재가 개입되어버리니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나'를 더 생각했으면, 조금만 '나'라는 존재를 배려했으면, 이라는 생각이 끼어들면서 결국 그렇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동그라미 1. 조심 또 조심 베트남 돈은 동그라미가 참 많다. 동전도 없다. 지난번 호치민에 갔을 때, 그 동그라미에 둘러쌓여 (사실 술 기운도 한 몫 했다.) 그만 바가지쓰고 말았다. 조그마한 항아리같은 것을 3만원이나 주고 사다니! 그래도 3만원에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동그라미가 많은 화폐를 사용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또 여행가고 싶다. 사실 아무 생각없이 쉬고싶다. 2. 만두에 대한 단상 지난주 식당에서 만두를 먹었다. 고추만두였는데,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고추만두였다. 뭔가 먹음직스럽지 못했다. 만두는 뭔가 손으로 빚어 울퉁불퉁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정확하게 생겨버린 만두는 정이 안갔다. 3. 둥글게 사는건 어렵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둥글..
*초심 1. 슬픈 사실 사실 이 곳에서의 초심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기는 커녕 그 어떤 이유도 생기지 않았다. 이유가 붙이면 그만이기도 했지만, 붙이면 그만, 안붙여도 그만인 이유따윈 필요없었다. 2. 그냥 해봐 '일단 해보자.' 이게 지금까지의 나를 만든 문장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생각을 해봐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냥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 문장때문에 쭉 뻗은 길을 놔두고, 빙빙 돌아온 적도 있고,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기도 했지만, 겪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하고, 금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도 알 수 있다. 3. 너에겐 귀감이 되는 ..
*레시피(recipe) 1. 나의 아침 이사를 하고, 가구를 사고, 마지막으로 주방 살림살이들을 채우는 중이다. 전기밥솥(사실 이건 집에서 밥을 직접 해 먹고 싶은 니즈에 의해 샀지만, 보온기능이 크게 떨어져 전자렌지를 살 예정이다.)을 샀고, 커다란 웍(파스타를 해먹을 용으로 샀지만 아직 파스타를 내 생애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다. 곧 시도해 볼 예정이다.)을 샀고, 주걱(고르고 골라 투명한 주걱을 사왔는데, 막상 집에와서 보니 예~전에 엄마가 챙겨준 새 주걱이 서랍장에 있었다. 그리고 전기밥솥에도 미니주걱이 딸려왔다. 결론은 난 주걱부자다.)을 샀고, 마음에 드는 포크를 샀고, 더치커피를 마실 기다란 유리잔도 샀다. 그리고 한 시간 이상 심혈을 기울여 고른 그릇들(하지만 그릇 선반이 없어 쌓아두었기..
*이쁨 1. My Favorite Things 햇살이 쨍하게 비추는 날을 사랑해. 나뭇가지에 올망졸망 붙어, 햇살에 비춰 반짝이며 잔잔하게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사랑해. 사각사각 책 넘기는 소리에 맞춰 은근하게 퍼지는 종이의 향을 사랑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마시는 맥주를 사랑해. 그 어떤 어둠도 지니지 않은 듯한 환한 웃음을 사랑해. 따뜻하게 바라보는 애정어린 눈빛을 사랑해. 2. 나에게 한동안 목표없이, 눈동자는 방황하고, 마음은 휘청이고, 시간은 하릴없고. 다시 하나 둘 쌓아가려 마음을 다독인다. 무너진 초석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하나하나 다시 토닥이고, 토닥여보자. 흔들리는 눈망울이 쉴 수 있는 초점을 주자. 3. 개인의 취향 이사를 하고, 완전한 내 공간에서 살다보니 내 취향을 더 ..
*환기 1. 마음먹은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살짝 창문을 열어보았다. 이삿짐을 조금씩 조금씩 많은 먼지가 나지 않게 청소하며, 살살 옮기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먼지가 있을까봐. 창문을 활짝 열자니, 미세먼지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아서 한 뺨도 안되게끔 열어놓았다. 밖엔 사생활보호창(이라고 부동산 아저씨가 그랬다.)이 달려있어서, 바깥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궁금하진 않았다. 이 공간에서 나는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다음 달을 맞이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공간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공간을 내 채취로 가득 채우며, 또 다른 나를 바라며, 변할 수 있는 나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가지고 있어도 아무 소용도 없는, 아무 힘도 없는 것들..
*괴물 시도하려고 하면, 두려움이라는 막에 눈 앞에 가려져 멈칫하게 되고, 두렵다, 두렵다, 하면서도 결국 이미 엎질러진 물 마냥 저질러놓고 있으며, 외롭다는 생각에 공허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주변을 비워놓고, 자꾸만 관계를 복잡하게 얽히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쉽게 풀지 못할 실뭉텅이처럼 인연의 끈을 엉키게 해놓고, 용기있게, 자신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다이어리 첫 번째 장에 매년 써 놓으면서도, 자존감이 종종 낮아지는 건지,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이유모를 소심함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고, 조금만 신중해지자, 신중한 결정을 내리자고 해놓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찰나의 고민 끝에 결정하게 되고, 유해지고, 조금만 온화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어느 순간 길에서 서식하는 경계심이 ..
*혐오 1. 울렁거렸던 하루 엄마가 소개시켜 준 보험설계사 아줌마를 만나는 날이 되었다. 보험에 무지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험에 대해서 열심히 캐물었다. 도대체 보험은 왜 드는 것이며, 내가 들고자 하는 연금보험은 어떤 것이며, 무슨 혜택이 있는 건지, 언제부터 나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손해를 본다면 그 손해는 무엇인지. 이렇게 캐 묻다보니, 문득, 도대체 왜 이렇게 수 백 가지, 수 천 가지가 되는 보험 종류가 생겨난 것이며, 사람들은 왜 보험사에 매달 열심히 돈을 내고 있는 것이며, 보험사는 왜 망하지 않는 것이며, (또는 왜 망하는 것이며), 보험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이 보험을 20년 만기로 들면, 나는 80세까지 살게..
*상상 1. 대화 조금만 내게 귀를 기울이면 많은 소리들이 들린다. 내 두 발이 말했다. 하이힐이 그렇게 좋냐고. 내가 소리지르는 건 들리지 않냐고. 그럴수록 나는 더 높은 힐을 찾았다. 내 왼팔이 말했다. 왜 오른팔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지 않냐고. 양 팔로 나눠 들면 조금은 더 가볍지 않겠냐고. 왼팔에겐 미안하지만, 오른팔에 무언가를 들고 있어서 못쓰게 되는 상황이 오면, 난 왠지 모르게 불안해. 내 귀가 말했다. 몇 개의 노래들만 듣지 말아달라고. 왜 하루에, 아니 일주일, 어쩌면 한 달 내내 몇 개의 노래들만 몇 년 째 듣고 있는 거냐고. 지겹지도 않냐고. 나는 이제 그나마 조금씩 다른 노래들을 찾기 시작했었고, 그리 성공율이 높진 않았다. 내 손톱이 말했다. 나도 예쁜 매니큐어 한 번 쯤 발라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