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초등학교 때 날 연자방이라는, 지금 들어도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부른 친구가 있었다. 내 기억에 서울 어딘가에서 전학 온 그 친구는 얼굴이 참 뽀얗고, 하얬고, 마치 미용실에서 갓 매직이라도 하고 나온듯한 쭉쭉 뻗은 생머리가 절대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살집이 조금 있어서(아마 젖살이었겠지) 웃을 때 굉장히 순해 보이던 그녀는 가을이 되자멋쟁이처럼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형사같아보여서 내가 맨날 강형사라고 불렀다. 하루는 학교 끝나고 늦은 오후쯤 강형사랑 나는 다시 학교를 향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강형사가 농구를 하자고 제안했고, 의욕이 넘치던 나는 단숨에 오케이했다. 강형사가 농구공을 들고나왔고, 우리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농구대 앞에서 열심히 공을 튀..
*2024년 나뭇잎이 점점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계절 아래 있다. 조금 있으면 낮에도 입김이 폴폴 나고, 씻고 난 후 수면 양말을 주섬주섬 챙겨 신고, 산미가 없는 원두를 찾는 추운 계절이 왔다고 느낄 즈음, 여기저기서 새로운 다이어리가 나왔다고, 내년 다이어리를 장만하라고 메일이 오겠지. 고르고 골라서 산 포근한 색의 코트들을 외면한 채 롱패딩만 골라 입을 그때, 우리는 어디서 웃고 있을까. 어디서 뛰어놀고, 어디서 껴안고, 어디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어디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어디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을까. 아마 5분만 걸어도 땀이 줄줄 나는 장소들을 추억하며 같이 커피 향을 맡고 있겠지. -Hee ···············································..
*나약함 1. 다가오는 볼을 라켓으로 팡! 때리려고 했지만 팅!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내 라켓과 몸을 볼 때 너무 나 자신이 약하게 느껴져 한도 끝도 없이 심란하다. 하지만 옆에선 약한 게 문제가 아니라 임팩트의 정확성, 임팩트의 타이밍이 문제라고, 힘의 문제가 아니라고 열심히 말해주지만, (글로, 유튜브로, 그리고 사람들의 자세를 봐오면서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괜히 내 하찮은 몸뚱어리를 탓하는 것이지. 오늘도 나는 그 스윗스팟인가 뭔가 하는 곳에 공을 맞추려고 노력할 것이고, 공을 끝까지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치기 편한 자세에서 치려고 조금 더 움직이려고 노력해야지.. 2. 혼자 생각하다 보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나약해지는 것 같아. 생각의 ..
*춤 그때도 지금처럼 일교차가 큰 가을이었다. 자켓이나 가디건이 필수인 밤에 S와 엄청 좋아했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와인에 빠져있던 S의 취향이 떠올라 S에게 '와인 마실래?'라고 물었더니, '그래!'라는 대답이 1초도 안되어 돌아왔다. 와인 보틀과 홍합 요리를 주문했고, 밀렸던 수다를 잔뜩 풀어대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더니 앞엔 빈 보틀과 그릇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적당히 취했는데 술은 더 마시기 싫어서 배부른데 나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어느새 S와 나는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목적지는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 심지어 그 클럽은 이제 젊은 나이대는 거의 가지 않는, 블로그 말을 빌자면 '옛날 잘나가는 오렌지 족이 갔던' 그런 클럽이었다. 어둡지만 휘황찬란하고 느껴지는 조명 사이..
*기다림의 끝 한때 사랑의 표현이, 사랑 고백이 금기였으려나 싶을 정도로 삭막한 때가 있었다. 어떤 이는 마치 먹이를 주듯 특별한 날에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래봤자 거의 한 번이었나, 에라이)했고, 어떤 이는 처음 만났을 때 달콤한 말로 나를 현혹시키더니 그 이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그 안주함에 속아 평생 삭막하게 살 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달달하고 올망졸망 표현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스타일인 줄 알았다. 주변에서 늘 누구를 만나든 서로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만나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 '난 애정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표현을 잘 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
*장바구니 장바구니에 하나씩 하나씩 가을, 겨울옷들이 쌓이고, 사라진다! (아마 결제했기 때문이겠지) 더운 나라에 살다가 3년 만에 제대로 가을, 겨울옷을 살 생각에 이미 한여름부터 신났었다. 껄껄. 포근한 색감의 니트들이랑, 원래 있던 가죽자켓 디자인이랑은 완전히 다른 디자인의 가죽자켓, 그리고 한동안 쳐다도 안 봤던 모직 치마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니, 이렇게 니트 색들이 예뻤어? 코코아? 크림? 오트? 이런 생각으로 하나 둘 집어넣어 보니 니트 부자가 될 것 같아서 결제 직전 정신 바짝 차렸다. 사실 작년 겨울에 일 때문에 2개월 정도 한국에 있긴 했었다. 그땐 다시 갈 생각으로 예전에 입고 넣어둔 옷장 속 깊은 곳에 있던 겨울옷들 꺼내서 어찌어찌 입다가 다시 한국을 떠났었는데. 이번엔 정석으로 ..
*변화(2) 나이 아흔 살이 넘으셨는데, 환갑만 넘으면 드시기 시작하는 고혈압약, 저혈압약 등등 그 어른들 사이에선 흔한 약 한 알 드시지 않고, 대신 세 끼를 나보다 더 많이 잘 챙겨드시는 우리 건강한 외할머니. 이미 전철이 노인분들에겐 공짜 교통수단이 된 시절부터 외할머니는 1호선을 타고 딸들 집을 왔다 갔다, 조금 유명한 재래시장이 있으면 거기도 다녀오시고, 늘 바쁘게 사셨다. 그리고 자식들이, 손주들이 그렇게 핸드폰을 사준다고 해도 아직까지 싫다고 절레절레 하시는 외할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집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와 통화하려면 할머니네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하고, 할머니가 받지 않는다면 어디 가셨는지 생각하면서 다시 할머니 오실 타이밍에 맞춰 전화한..
*그곳에 가면 난 기본적으로 장소와 음악을 추억과 결부시키는 재능(이랄 것까지야)이 있다. 내가 그 당시엔 이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그곳에 있었지. 내가 그땐 저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누구와 그곳에 있었지. 이런 시시콜콜한 추억들이라고 모두 말하기엔 조금 주춤스럽지만 그런 기억들이 모두 장소, 음악, 그리고 사람과 얽혀있다. 그래서 때론 특정 장소들과 음악들을 피할 때도 많았다. 물론 장소들과 음악들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내가 한데 엉클어 놓은 그런 것들이 나를 속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장소들, 음악들에게 내가 스스로 나만의 프레임들을 씌워둔 게지. 그래서 이젠 조금 놓아주고, 자유로워지려고. 그 프레임들을 벗겨내고 다시 새로운 눈으로, 마음으로 (비록 또 다른 프레임이 씌워질 게 분명하지만) 볼 것이고..
*고민 1. 고민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루하루 고민 없이 먹고, 자고, 놀았고, 지금이 분명 제일 인생에서 행복한 때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뇄다. 모든 조건들이 완벽했다. 모든 조건들이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근데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았었고, 작은 틈 사이엔 일방인지 아닌지 모를 사랑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번지수를 잘 못 찾은 애정은 공중에 흩어졌다. 그렇게 행복을 세뇌시키며 지냈었다. 2.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땐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뭐. 이것저것 재고 있다간 아무것도 못한다고. 일단 해보는 거야! -Hee ···············································································..
*자판기 1. 내가 자주 읽고 자연스럽게 손이 뻗게 되는 그런 책들 말고, 더 다양한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그냥 랜덤으로 책이 나오는 자판기가 집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 도형이든, 색깔이든, 여러 버튼이 구분되게 나열되어 있는데 돈을 넣고 그날 내가 끌리는 버튼을 누르면 어떤 책이 딸깍하고 떨어지는 거지. 그게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문제집이 될 수도 있고,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두꺼운 역사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책을 읽어도 되고, 누군가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 선물을 해줄 수도 있고. 늘 그 자판기 앞에 서면 어떤 책이 나올까 설렐 것 같다. 2. 조만간 3년 만에 제대로 된 한국의 겨울을 느낄 것 같다. 작년 초에 잠시 한국에 왔었을 땐 이게 겨울인지 뭔지 싶기도 전에 정신없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