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1. 슬픈 사실 사실 이 곳에서의 초심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기는 커녕 그 어떤 이유도 생기지 않았다. 이유가 붙이면 그만이기도 했지만, 붙이면 그만, 안붙여도 그만인 이유따윈 필요없었다. 2. 그냥 해봐 '일단 해보자.' 이게 지금까지의 나를 만든 문장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생각을 해봐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냥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 문장때문에 쭉 뻗은 길을 놔두고, 빙빙 돌아온 적도 있고,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기도 했지만, 겪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하고, 금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도 알 수 있다. 3. 너에겐 귀감이 되는 ..
*레시피(recipe) 1. 나의 아침 이사를 하고, 가구를 사고, 마지막으로 주방 살림살이들을 채우는 중이다. 전기밥솥(사실 이건 집에서 밥을 직접 해 먹고 싶은 니즈에 의해 샀지만, 보온기능이 크게 떨어져 전자렌지를 살 예정이다.)을 샀고, 커다란 웍(파스타를 해먹을 용으로 샀지만 아직 파스타를 내 생애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다. 곧 시도해 볼 예정이다.)을 샀고, 주걱(고르고 골라 투명한 주걱을 사왔는데, 막상 집에와서 보니 예~전에 엄마가 챙겨준 새 주걱이 서랍장에 있었다. 그리고 전기밥솥에도 미니주걱이 딸려왔다. 결론은 난 주걱부자다.)을 샀고, 마음에 드는 포크를 샀고, 더치커피를 마실 기다란 유리잔도 샀다. 그리고 한 시간 이상 심혈을 기울여 고른 그릇들(하지만 그릇 선반이 없어 쌓아두었기..
*이쁨 1. My Favorite Things 햇살이 쨍하게 비추는 날을 사랑해. 나뭇가지에 올망졸망 붙어, 햇살에 비춰 반짝이며 잔잔하게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사랑해. 사각사각 책 넘기는 소리에 맞춰 은근하게 퍼지는 종이의 향을 사랑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마시는 맥주를 사랑해. 그 어떤 어둠도 지니지 않은 듯한 환한 웃음을 사랑해. 따뜻하게 바라보는 애정어린 눈빛을 사랑해. 2. 나에게 한동안 목표없이, 눈동자는 방황하고, 마음은 휘청이고, 시간은 하릴없고. 다시 하나 둘 쌓아가려 마음을 다독인다. 무너진 초석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하나하나 다시 토닥이고, 토닥여보자. 흔들리는 눈망울이 쉴 수 있는 초점을 주자. 3. 개인의 취향 이사를 하고, 완전한 내 공간에서 살다보니 내 취향을 더 ..
*환기 1. 마음먹은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살짝 창문을 열어보았다. 이삿짐을 조금씩 조금씩 많은 먼지가 나지 않게 청소하며, 살살 옮기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먼지가 있을까봐. 창문을 활짝 열자니, 미세먼지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아서 한 뺨도 안되게끔 열어놓았다. 밖엔 사생활보호창(이라고 부동산 아저씨가 그랬다.)이 달려있어서, 바깥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궁금하진 않았다. 이 공간에서 나는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다음 달을 맞이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공간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공간을 내 채취로 가득 채우며, 또 다른 나를 바라며, 변할 수 있는 나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가지고 있어도 아무 소용도 없는, 아무 힘도 없는 것들..
*괴물 시도하려고 하면, 두려움이라는 막에 눈 앞에 가려져 멈칫하게 되고, 두렵다, 두렵다, 하면서도 결국 이미 엎질러진 물 마냥 저질러놓고 있으며, 외롭다는 생각에 공허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주변을 비워놓고, 자꾸만 관계를 복잡하게 얽히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쉽게 풀지 못할 실뭉텅이처럼 인연의 끈을 엉키게 해놓고, 용기있게, 자신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다이어리 첫 번째 장에 매년 써 놓으면서도, 자존감이 종종 낮아지는 건지,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이유모를 소심함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고, 조금만 신중해지자, 신중한 결정을 내리자고 해놓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찰나의 고민 끝에 결정하게 되고, 유해지고, 조금만 온화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어느 순간 길에서 서식하는 경계심이 ..
*혐오 1. 울렁거렸던 하루 엄마가 소개시켜 준 보험설계사 아줌마를 만나는 날이 되었다. 보험에 무지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험에 대해서 열심히 캐물었다. 도대체 보험은 왜 드는 것이며, 내가 들고자 하는 연금보험은 어떤 것이며, 무슨 혜택이 있는 건지, 언제부터 나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손해를 본다면 그 손해는 무엇인지. 이렇게 캐 묻다보니, 문득, 도대체 왜 이렇게 수 백 가지, 수 천 가지가 되는 보험 종류가 생겨난 것이며, 사람들은 왜 보험사에 매달 열심히 돈을 내고 있는 것이며, 보험사는 왜 망하지 않는 것이며, (또는 왜 망하는 것이며), 보험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이 보험을 20년 만기로 들면, 나는 80세까지 살게..
*상상 1. 대화 조금만 내게 귀를 기울이면 많은 소리들이 들린다. 내 두 발이 말했다. 하이힐이 그렇게 좋냐고. 내가 소리지르는 건 들리지 않냐고. 그럴수록 나는 더 높은 힐을 찾았다. 내 왼팔이 말했다. 왜 오른팔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지 않냐고. 양 팔로 나눠 들면 조금은 더 가볍지 않겠냐고. 왼팔에겐 미안하지만, 오른팔에 무언가를 들고 있어서 못쓰게 되는 상황이 오면, 난 왠지 모르게 불안해. 내 귀가 말했다. 몇 개의 노래들만 듣지 말아달라고. 왜 하루에, 아니 일주일, 어쩌면 한 달 내내 몇 개의 노래들만 몇 년 째 듣고 있는 거냐고. 지겹지도 않냐고. 나는 이제 그나마 조금씩 다른 노래들을 찾기 시작했었고, 그리 성공율이 높진 않았다. 내 손톱이 말했다. 나도 예쁜 매니큐어 한 번 쯤 발라보고..
*안녕하세요 1. 약속시간을 너무나도 어겨버린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던 그날 "어머,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그를 처음 만난 나의 인사는 안녕하세요, 대신 죄송해요, 였다. 약속시간을 거의 한 시간 반 남짓 늦어버리고야 만 나는, 빈 손으로는 갈 수 없어 사과의 의미로 작은 꽃기린 화분을 하나를 내밀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며, 괜찮다며 어색하게 나를 위로했다. 이야기의 흐름은 다채로웠다. 근황에서 서비스로, 서비스에서 우주로, 우주에서 사람으로. "전 그 때 그런 모습이 참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하려던 것을 참고, 그 당시 왜 그러셨냐고 질문했다. 그와 만나기 반 년 전 쯤, 한 아카데미에서 그와 나는 각자 다른 조의 조장이였다. 아카데미에 참여한 모든 사람..
*홍차 1. 그녀의 존재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남자주인공은 홍차를 파는 카페 자주 간다. 그 남자주인공은 홍차카페의 예쁜 여자주인이 자신에게, 특히 자신이 여자인 친구들 데려오는 날에는 더더욱 자신을 대하는 표정이 좋지 않다고 느낀다. 남자주인공이 느끼기에 그 카페주인의 자신을 대하는 표정이 너무 티가 많이 나는 것 같아, 언젠가 한번 꼭 나에게만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하지만, 곧 자신에게 들이닥친 다른 관계들때문에 그 홍차카페의 여자주인은 금새 머릿 속에서 잊고 만다. 난 사실 남자주인공과 실제 여자주인공의 결말도 궁금했지만, 남자주인공과 홍차카페의 주인사이의 결말이 더 궁금했다. 왜 홍차카페의 주인을 그렇게 묘사했을까. 사실 남자주인공이 그녀의 관심을 내심 받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그 ..
*초밥 1. 초밥의 신세계 처음으로 맛있는 초밥을 먹었던 게 언제였더라. 어릴 적엔 굳이 초밥이라는 건 대형마트에서 300원, 500원, 700원에 파는 이름모를 생선들의 잔재가 초간을 한 밥알 위에 투박하게 올려져 꼬깃꼬깃 비닐로 쌓여져 있는 걸로만 알았던 나였는데. 그 맛있는 초밥을 만나게 된 연유는, 21살 여름이였을 적이였나. 그 때의 나는 겨우 귀 뒤로 머리를 넘길 수 있었던 숏컷이였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하얀 바탕에 검정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실크 소재로 된 그 블라우스는 여름에만 입었기 때문에 그 때가 여름이였다고 짐작하며, 20살 여름에는 함께 갔던 스타트업 대표님을 알지도 못했으며, 21살 여름방학에는 그 대표님을 따라 춘천에 있었고, 22살 여름에는 몇 지역을 방황하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