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1.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벽증이다.
내 블라우스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
내 하루에 대부분은 키보드를 칠 일이 많은데,
그때 내 옷 팔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이
너무 싫다.
닿지 않게 하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위에 무조건 사무실용 긴 소매 겉옷을 입거나
팔만 끼우고 키보드를 친다.
손목을 아예 들고 칠 수는 없으니.
그 향수를 뿌린 팔목 안쪽이 어딘가에 닿는 게 너무 싫다.
소매가 짧은 옷을 입어서 팔목이 그대로 드러나 차가운 책상에 닿는 것이 싫고,
긴 소매 옷을 입더라도, 그 긴 옷조차 닿는게 싫다.
그렇다고 내 책상은 항상 닦아서 먼지 한 톨 없을 텐데,
그래도 싫다.
에어컨이 추워 가져다놓은 사무실용 옷은 
내 팔목과 그날 입은 내 긴 옷소매를 지켜주는 데에도 쓰인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이렇게 강박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어느샌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이상한 결벽증.

2.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중요한 곳에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길 바랐는데
희미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직은 눈에 휘이 보이는 얼룩.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길 기다렸던
얼룩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식은땀이 나고, 숨이 막히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그런 얼룩.

3.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 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 뿐이네

페르소나, '밤을 걷다' 중

4.
그동안 되게 우스웠던 건
내 옷도 아닌 그 옷에 누군가 무언가를 흘렸고
세탁을 여러 번 했는데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런데도 나는 그 옷을 옷장 속에 여러 해나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너무 참담하기 그지없네.
어디에 예쁘게 입고 나갈 옷도 아니면서.
얼룩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나 겨우 입고 나갈 정도였는데.
그 옷이 뭐라고. 5년도 넘게 가지고 있다가 버렸냐는 말이야.
사실 돌이켜보면 옷의 주인인 너의 마음과는 달리
난 그 옷을 꾸역꾸역 열심히 입어가면서
어떤 풍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날 스스로 보고 싶었나 봐.
이제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서로에게 긁히고 긁혔던 부분들이
저 깊숙한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무의식까지도 꿋꿋하고 싶었거든.
어떻게든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었거든.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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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지다

1.
다림질을 못하겠다.
어떤 블라우스를 세탁기에 빨면 
매우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졌던데.
다림질 그게 뭐 어렵냐 하겠지만
내겐 어려워.. 
그래서 구겨진 블라우스 3-4개를
집 앞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도 필요 없고 그냥 다려달라고만 했는데
다행히 다려준다고 했다.
세탁소 직원이 나보고 옷걸이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집에 옷걸이 많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게 큰 실수였다.
약속한 날 블라우스들을 찾으러 가보니
곱게 다려진 블라우스들이
큰 세탁 봉투 안에 접혀져서 (^^) 밀봉이 되어있었다.
집에 와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 블라우스를 꺼내었더니
역시.. 몸통 부분은 접혀진 모양대로,
팔 부분들은 또 다른 모양대로 구겨져있었다.
헤헤.
난 왜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긴 걸까.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진 블라우스들은
다시 옷장 속에 고스란히 걸려있다.
스팀다리미 작은 건 예전에 써봤는데 그건 그거대로 어렵던데..
음.
모르겠다.

2.
사실 그때 답장을 하지 못한 건,
내가 네게 또 빠질까 봐.
근데 넌 그 이후로 다시 연락하지 않더라.
단 하나의 메시지도 없더라.
넌 너대로 마음이 구겨졌을지도 모르지.
난 나대로 마음이 구겨졌고.

3.
천장만 보고 누워있던 적이 있었지.
너무 어이없고 허무하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바깥 날씨는 이렇게 좋고 반짝이는데
나만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게
너무 화가 났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속에 화가 많이 나서
사람이 화병이 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깟 감정 상한 게 뭐 대수라고
누구 하나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곧추세우며
서로를 마구 물어뜯으며
그렇게 어느 여름날을 보낸 적이 있었지.
여름날이 오면 하고 싶었던 모든 계획들은
다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이 아까워서 속이 타들어갔었지.
그땐 고민이 많았다. 
그때만 그런 것인지,
또는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4.
그렇게 들으라고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고 
베이스를 튕기지만
애써 외면한다.
외면해버린다.
완벽하게 구겨진 내 모습이
그 음악에 투영되어 보일까 봐.
그 모습이 거울처럼 내 앞에서 서성거릴까 봐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만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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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1.
사실 그 침대에 누워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부모님은 내 침대를 정돈하신다.
철마다 이불을 바꾸고,
동생 전기장판 바꿀 때 내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도 덩달아 바뀐다.

2.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훨씬 쉽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아는 것이 힘이 될 땐 
정말 엄청 많은 것을 알아야 힘이 되는데,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땐
조금만 몰라도, 저것만 몰라도, 이 사실만 몰라도 
약이 될 때가 많다.

3.
침대의 사이즈가 어떻든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싱글이면 충분)
근데 퀸사이즈, 킹사이즈를 쓰다보니 큰 사이즈가 좋긴 좋네..

4.
어느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미처 묶은 머리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워버려서
머리가 배겼다지.
그래서 누워서 머리끈을 뺀 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는 날이 부지기수.
그래서 내 침대엔 항상 머리끈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플러스로 앞머리 위로 올릴 때 쓰는 헤어핀까지..)
얘네들이 내 침대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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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20대가 되면 한 번 쯤은 자취에 대한 로망,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런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 밖에서 살 게 된 건,
21살때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춘천에 가서 디자이너언니랑 같이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작은 원룸이나 투룸이 아닌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고, 온전하게 혼자만 사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딱히 자취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그 곳은
어떤 가구를 사다 들여놓거나, 집을 꾸미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직장 주변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을 때도, 
정말 실용적인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후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계기도,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여 이동하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기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오롯이 더 써야 겠다는 그 생각만으로 방을 구했다.
잠을 자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공간일 뿐이였다.

월세를 내고 사는 공간은 완전한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매우 컸지만
뒤늦게나마 내가 오랜 시간을 어떤 공간에서 보낸다고 실감이 났을 때,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형태라는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 공간에 조금씩 정을 붙여 인테리어를 한답시고 한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자석들이나 사진들을 냉장고에 붙인다거나,
작은 화병을 사서 꽃을 꽂아 둔다거나,
아끼는 엽서와 좋아하는 작가의 달력을 벽에 붙이는 게 다였다.
나중에 어떤 집이 될 지 모르겠지만 온전한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에서 살고 있을 땐 
(어쩌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구일지도 모르는) 테이블부터 골라봐야지. 

2.
아무리 비싼 가구들과
누가봐도 예뻐보이는 인테리어가 아주 잘 된 집에 살고 있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내'가 불행하다면.

3.
공간도, 사람도 모두 경험해볼수록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지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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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

1.
말레이시아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입 안 어디든간에 염증이 먼저 난다.
생리 직전에도 나고,
잠이 부족할 때도 나고,
술을 자주 마셨을 때도 나고,
그냥 피곤할때도 나고.
입에 염증이 생기면 일단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신호인 걸 깨닫고는
따뜻하게,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고 
과일도 많이 먹고, 침대에도 일찍 눕는다.
그리고 내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입 안에 바르는 연고가 놓여있다.
저 연고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산 약이였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뭔가 불안하다.
다른 약들은 다 깊은 서랍 속에 놓여 있는데
저 연고만은 내가 마치 부적처럼 보기만해도 안심이 된달까.

2.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미움을 사고.
내 안에 곪아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가만히 회상해본다.
그 때 난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이제라도 외쳐볼까 싶어
마음이 달싹 하지만서도
가만히 묻어두어야 하는게 맞는 걸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마음에 묻어두어야 할 것들인걸까.
시간 속에 방치해둔채로 그대로 곪아버린 그 것들은
내 마음 속에 제멋대로 흉이 되어 남아있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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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만 봐도

1.
종종 살다보면
바라만 봐도 귀여운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자꾸 귀여운 모습들을 더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사랑스럽고 오래 보고 싶어서
자꾸만 초등학생처럼 시비걸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
영원히 귀여움을 잃지 말길-

2.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예쁜 잔에 커피가 나오면 마시지 않아도 배불러
오늘 마침 딱 그랬거든
진짜 인생 통틀어 가장 예쁜 커피잔과 커피잔 받침이였어
차가운 라떼를 시키려고 하다가
그냥 따뜻한 라떼를 주문한 것이 천만다행이였어
내가 그 커피잔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야

3.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좋은 점은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풍경을 한도끝도없이 볼 수 있다는 것.
맑고 푸른 하늘, 초록초록한 잎이 잔뜩 달려있는 나무들 따위 말이야.
적어도 내겐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없는 날+하늘이 맑은 날+초록 나뭇잎을 보는 날이 무척이나 귀했거든.
그런 날엔 차 안에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날이 많아서
좋아하는 것들을 보기 위해선 마음이 급했어
눈에 담기 바빴고, 카메라에 담기 바빴어

4.
작년에 뉴욕갔을 때 면세점에서 (잘못) 주문한 향수가 있었어
심지어 작은 병도 아니었는데,
신나게 면세점가서 향수 받아들고 
액체라 아예 뜯질 못하니까
14시간 정도 날아서 뉴욕에 도착한 후
가랑비 오는 뉴욕을 우산도 없이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마라톤 부스에서 번호표 받고, 타미스 사무실 찾아서 미리 예약한 바우처들 받고,
에스컬레이터따윈 없는 전철역 계단을 낑낑대고 오르내리다 
드디어 도착한 첫 호텔에서 향수를 뜯었지.
그 향수는 그 당시로부터 2년 전에 사용하던 향수였는데
2년 전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산 것이였거든.
그래서 잔뜩 기대하고 포장을 뜯어서 뿌렸는데 이게 뭐람.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향이였지.
한끗차이로 같은 라인 중 다른 향수를 주문한거야.
병 색도 너무 비슷해서 (투명도만 살짝 다름)
면세물품 받았을 때도 감쪽같이 몰랐지.
뉴욕 여행 내내 뿌리려고 사서 다른 향수는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그 향수를 10일 내내 사용했어.
그리고 은근 향이 익숙해져서 그 뒤로 8개월 정도 그 향수를 계속 썼지.
뉴욕에서 처음 향수를 뜯었던 날을 떠올리면서.
드디어 어제, 새로운 향수를 샀어.
아직 그 (일명)뉴욕 향수는 절반 정도 남아있는데 말이야.
새 향수는 뉴욕 향수와 아예 정반대 느낌의 향이여서
고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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