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겨울, 너는 성질도 급하지.11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10월의 여유가 며칠은 남아있는데.그새 찬바람을 데려오다니.'나 아직 여기 있는데'라는 가을의 외침이 그나마 아직은 강한 햇볕으로 말해준다.나 역시 성질이 급해서 11월이 되면 내년 다이어리를 고른다.이번엔 어떤 다이어리를 써볼까, 하면서도 벌써 같은 브랜드의 다이어리를 3년째 쓰고 있다.내년에는 새로운 브랜드의 다이어리를 써 볼 생각이다. 2.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꽤 많은 변화가 생겼다.무엇이든 변하는건 움추리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고, 고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변화가 클수록, 흔들림도 많아지고, 과도기인 순간들도 맞이하지만,어쨌든 좋다.무엇이 되었든 좋다.새로운 것을 ..
*커피 1.그런 관계 있잖아.그냥,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관계.더도 말고 덜도 말고,서로가 건강했으면 싶고, 어디 다치지 말았으면 싶고, 맛있는 음식만 먹었으면 싶고.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그냥 그저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관계.거대한 우주의 톱니바퀴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긴 삶도 짧은 삶도 아닌 우리의 생애를 살고 있는데,그 생애 가운데에 어쩌면 찰나의 순간일수도 있는, 그렇지만 한 사람의 우주 속에선 억겹의 시간으로 느낄 수도 있는,그런 순간순간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내 마음속에, 내 머릿속에,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 자체에,소중함을 품을 수 있는 그런 관계.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지 몰라도,어떤 누..
*전화 1.전화가 왔다.나는 사무실에서 나와 여자화장실 맨 끝 칸으로 들어갔다.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심장이 내려 앉았다.대충 전화를 얼버무려 끊었다.그녀는 왜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마음 속에 있는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얼마나 그녀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그 이면엔 내 잘못이 있었던 건 아닐까.나의 충분하지 못한 애정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진 않았을까.우리가 같이 있던 시간에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애정으로 대해줄걸.엄청난 시간들을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따뜻하지 못했다.항상 나를 먼저 생각했고, 그녀는 항상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게 양보했다.나는 항상 그녀의 앞에 있었고, 그녀는 항상 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어렸던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살펴 ..
*벽 1.견고하게 쌓았다고 생각한 벽에 틈이 있었나보다.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고, 무너지고, 기울고 있다.우려했던 것과는 반대로 나의 벽이 먼저 무너져내렸다.약간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무너져도 괜찮다는 결론이 나왔다.괜찮아. 벽은 다시 쌓아올리면 그만이니까.얼마나 튼튼하게 쌓아올리냐의 문제니까.오래걸려도 괜찮다.괜찮아. 2.내 등 뒤에 많은 공간이 있는 것보다 내 눈 앞에 많은 공간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그 날도 자연스럽게 벽을 등지고 앉았다.내 앞에는 내 귀를 행복하게 하는 소리들과 약간은 정신없지만 나름 질서있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존재만 느꼈을 뿐 다른 모든 것들도 새로웠기에 그리 비중있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어떤 눈길이 나에게 닿았는지조차 인지..
*여자 1.성별에 관계없이 우린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고, 인간일 뿐이다.인간이라서 사랑하는 것뿐이고, 상처받는 것뿐이고, 기억하는 것뿐이고.우리는 고독하다.어떨땐 너무나도 고독해서 그 마음을 헤아릴수도, 걷잡을수도, 다독일수도 없어 허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을 수 밖에.때로는 이리저리 휘청이고, 흔들리고, 갈피조차 잡을 수 없어 두려움이 생기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우리는 한없이 나약하다. 그래서 사랑한다. 2.처음 본 그 여자는 굉장히 까맣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말랐다.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하지만 무언가 발라져있긴 했다)듯한 얼굴에, 검정색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안녕하세요'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인사에 답하며 굉장히 멋쩍어하면서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만난 목적에 알맞게 서로 상투적인 이..
*형/오빠 1.너랑 나 사이는 이거밖에 안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표면상으로 좋은 사이로 지내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으나정작 마음을 살펴볼 시도조차 안하는 너의 모습이 난 답답했다.그냥 내가 너에게 계기조차 마련하지 하지 않았다면 너 역시 시도해 볼 생각자체를 하지 않았겠지. 사실 그건 마음을 살펴볼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일수도 있으나, 못해서 안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그렇게 항상 내 자신을 합리화시켰던 것 같다. 2.너랑 나 사이는 항상 잔잔했다.너는 큰 물결이 일지 않았다.혹여나 커다란 돌멩이가 너라는 호수에 퐁당 빠진다면넌 아마 크게 흔들렸겠지.어쩌면 돌멩이가 자의적으로 날아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잔잔함은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줄 지는 모르겠지만,역동적이고 가슴이 뛰는 열정을 직접적으로 주지는 않는다..
*기다림 생각보다 늦게 온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너를 기다리지 않았다. 짧지 않은 순간들 동안 나는 내 마음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왕 손에 책이 들려있으니 읽어볼까, 하며 책을 펼쳤지만 전혀 단어와 문장들이 읽히지 않았다. 나는 내게 되묻고 또 되물었다. 물론 100% 객관적이기 힘들지만. 언제나 내 자신을 살펴보듯 잘 하고 있는 지, 정말 괜찮은지.내 선택과 행동에 조금이나마 내가 놓치고 있는 틈은 없는지. 최대한 감정들을 딱딱하게 만들고, 사실들만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홍수같이 밀려드는 감정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자꾸만 나를 흔들었고, 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 감정들에게 속지 않으려고 애..
*추천 1.그땐 그 곳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그저 아는 커플을 따라갔을 뿐이였다.아직 해가 지지않은 늦은 오후의 그 곳은 아늑했다.나무로 된 테이블과 그리 밝지 않은 은은한 조명. 장식용으로 소품들을 잔뜩 갖다 놓아 진열해 놓았지만,벽 한 면을 가득 채운 큰 책장만큼이나 더 멋진건 없었다.그나마 궁서체로 진지하게 써있는 '마음'이라는 글자를 담은 프레임만이 선명했다.그 곳에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맛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함께 갔던 커플 집에서 빌렸던 (정확히 말하면 커플 중 언니의 것) 수 권의 책 들이 내 옆을 차지하고 있었고,오빠와 언니는 기타와 악보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그 곳엔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온다고 했다.그 곳은 예전에 있었던 곳에..
*팔찌 2년 전 여름에도 나는 팔찌를 만들었고, 1년 전 여름에도 나는 팔찌를 만들었었다.사실 팔찌는 내가 즐겨하는 악세서리 축에도 낄 수 없었다. (목걸이도 마찬가지고)악세사리는 귀걸이와 반지만 그나마 내게 전부였는데 지난 2년동안 팔찌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친한 친구가 팔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생겼고, 그저 '해볼래?' 던진 한 마디를 덥석 물고 그대로 팔찌의 세계로 입문했다.마음을 먹으면 의욕이 생기고, 의욕이 생기면 행동해야 하는 내 성격에 바로 새벽에 일어나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향했다.무더운 여름날 약간 헐렁한 반팔에 짧은 치마를 입고, 통로가 좁은 매장 사이사이를 누비려고 미리 발 편한 슬리퍼도 챙겼다.평화시장 입구 앞에서 나는 슬리퍼로 갈아신고 친구들과 함께 꼬깃꼬깃 ..
*산책 1.식사를 하고 배가 부르면 산책을 하자고 100번 중에 99번은 이야기를 하는데,요즘은 배가 부르지도 않고, 부러 산책을 하지도 않는다.단지 무더운 여름날이여서 입맛을 잃은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혹여나 내 입맛에 음식이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내 체중과 하루에 쓰이는 에너지의 양을 지탱하기 위한 정도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수저를 내려놓는다.그렇다고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대부분 일정한 몸무게였고, 여름이라 조금 더 살이 빠지면 빠졌지 더이상 찌진 않았다.예상하기로는 아마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운다는 생각보다 그 이면에 완전 다른 생각들이 엉켜있어서 그런건 아닌가싶다.음식을 먹으면서도 머릿 속은 이미 다른 생각들로 엉켜있고, 그러니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