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1. 죄책감
집 앞 복도 끝에 있는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그곳은 타칭 택배함으로 이 건물 택배는 층마다 있는 보일러실에 배달된다.
우리집 호수가 매직으로 크게 쓰여져 있는 택배상자가 두 개 있었다.
두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저번주에 주문한 블라우스였고, 또 하나는....
피크닉 세트?
난 피크닉 세트를 시킨 적이 없다.
오늘따라 택배 상자를 바로 칼로 뜯지 않고 무심코 택배 상자 겉에 쓰여져 있는
내용물을 읽어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소를 확인해봤다.
옆옆집 택배였다.
어떻게 된건가 생각해보니,
택배 아저씨가 깨알같이 작은 폰트 사이즈로 붙어있는 주소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배달하기 위해
매직으로 호수를 크게 써 놓은 곳에서 오류가 발생했다.
주소 스티커에는 옆옆집이였는데, 실수로 우리집 호수를 매직으로 크게 써 놨던 것이다.
피크닉세트를 시킨 옆옆집 사람에게 더 기다리지 않게 다시 그 택배상자를 보일러실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나.
퇴근 후 불현듯 그 택배상자가 떠올랐다. 잘 찾아 갔겠지?
혹시 매직으로 크게 쓰여져있는 우리집 호수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대로 있는건 아니겠지?
또다시 복도 끝에 있는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다를까 택배는 그대로 있었다.
정말 매직으로 크게 쓰여진 우리집 호수를 보고 찾아가지 않은걸까?
아니면 바빠서 아직 보일러실 문을 열어보지 않고 있는걸까?
아.. 저 매직 호수 자체를 내가 차라리 제대로 바꿔놓을까? 
흠, 집에 굵은 매직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매직이 없었다.
뭐, 알아서 잘 가져가겠지. 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났다. 계속 그 택배가 마음에 걸렸다.
괜히 내가 매직으로 호수를 제대로 바꿔써주지 못했던 사실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보일러실 문을 열어보았다.
택배가 사라졌다.
드디어 잘 찾아갔구나, 하며 괜히 안심이 됐다.
죄책감도 사라졌다.

2.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확인해보니 소셜커머스 링크를 내게 공유해줬다.
뭐지, 하고 열어보니 2L생수 8통을 엄청 싸게 파는 링크였다.
나는 바로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이 소소한 구매는,
친구와 나 모두의 속이 다 시원한 구매였다.
전말은 이렇다.

물은 무겁다.
2L짜리 물통은 정말 무겁다.
2L 생수 6통은 너무너무 무겁다.
어느 주말,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 앞에 2L 생수 6통짜리들이 엄청 많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굉장히 싸게 세일하고 있었다.
마침 집에 생수가 떨어져서 물을 살 마음에, 편의점 앞으로 다가갔다.
생수 6통을 단단하게 묶어놓은 끈을 잡았다.
영차!하며 팔에 힘을 줬는데 들지 못했다.
다시 한번 영차!하며 팔에 힘을 줘서 들으려고 노력했다.
생수들은 옆으로 이동만 할 뿐 들리지 않았다.
아.
너무 웃기고, 황당한 마음으로 다시 뒤돌아서 집으로 걸어갔다.
생수 살 돈은 있어도 생수를 들 힘이 없다면 생수를 싸게 사지도 못한다.
그냥 한 통, 한 통 사 마셔야 하나.
생각해보면 집에 생수를 들고왔던 사람은 내가 아니였다.
종종 친구들이 집에 놀러올 때 생수 6통짜리를 사 들고 왔었다.
그렇게 받기만 했더니 생수가 이렇게 무거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서글픈 순간을 친구에게 토로했다.
예전부터 종종 친구는 내게 말했다.

제발 물, 이런건 인터넷으로 주문하라고.
그럴때마다 나는 물은 너무 싸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괜히 택배아저씨 무겁게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시키지 않는다고 대답했었다.
다시 친구가 반박했다. 집 건물이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주문해도 괜찮다고. 진짜 착한거라고.

어느 날 우리집 앞에 물이 배달되어 있었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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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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