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1 "어, 형식아 나야. 뭐하냐? 아직도 가게하냐? 오- 그래도 오래하네. 잘 되나보네 바쁜게 좋지. 야 안그래도 나도 수원역에 가게 얻었다. 응 안양보다는 수원이 유동인구가 이십만명이래. 어, 안양보다는 괜찮은거 같아서 20평짜리 2억 2천만원에 계약했어. 회사? 회사는 사직서내야지. 아, 근데 돈이 조금 모자르다. 집에서 해줄 수 있는건 1억정돈데, 나머지를 구해야되. 너 돈 좀 남는거 있냐? 아, 그렇지, 먹고살기 힘들지. 은행에서 대출도 알아보고 해야지. 응, 응. 그래. 언제 가게 한번갈게. 맥주나 마시자. 아, 부모님도 잘 계시지. 뭐 잘 하라고 하셔. 그래그래. 응 다음에 또 연락할게"

-어느 초가을 밤, 22시경에 전철에서 들렸던 통화 중.


2. 보고싶었던 친구 A와 함께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말이라서 펍 밖에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동네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는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같이 있었던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했고, 회사도 다니고, 생활패턴이 바뀌면서 예전보다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아 사기엔 뭔가 아깝다고 했다. 그 와중에 멀어졌던 친구 B랑 연락이 되었다. 친구 A가 말하기를, 친구 B가 날 보고싶어했다고. 나와 친구 B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었기 때문에 안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모두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우리가 앉아있었던 펍으로 오라고 했다. 친구 B가 도착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엄청 보고싶었어!' '어, 나도 궁금했었어. 정말 오랜만이다' 서로 어색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현재 뭘 하고 있고, 어디에 살며, 부모님들은 잘 계신지, 그런저런 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친구 B를 보고있던 친구 A는 너네 무슨 소개팅하냐면서, 왜 이렇게 어색하냐며, 너네 옛날에 엄청 친하지 않았냐며, 깔깔대며 웃었고, 그 말에 나와 친구 B도 웃음을 터트렸다. '나 많이 변했지, 넌 그대로다'라며 친구 B가 말했다. '음, 화장이 조금 진해진 것 빼고는 너도 똑같은데?'라고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친구 A는 친구 B에게 담배피러 나가자고 했고, 친구 B는 내게 '나 이렇게 변했어. 흐흐.'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 나갔다. 모두가 사람이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서로 겉모습이나 지니고 있는 가치관 등이 변한건 분명한데,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B도 정말 10년만에 만났지만 말투나 모습이 달라졌어도 내가 그 친구에게 예전에 느꼈던 느낌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뭔가 안심이 되었다. 사실 나도 궁금했다. 예전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싸운것도 아니였고, 생각해보면 유치했지만 굉장히 어설프고 어이없게 멀어졌었기 때문에 종종 생각이 나긴 했다. 나이가 들면서 언젠간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가끔 했었지만 굳이 생각뿐이였다. 운 좋게도 이런 내게 먼저 연락을 해오고, 먼저 이야기를 건네오고, 먼저 안부를 물어주어 정말 고마웠다. 자리로 돌아온 친구 B는 약속이 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고, 나중에 꼭 다시 보자며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쉽게도.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기에, 그 친구를 꼭 다시 보고싶다. 꼭 다시 볼 수 있겠지?


3. 내가 20대 초반이였을때, 2~3년사이로 지역과 장소를 초월하며 혼자 이사를 다녔던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쌀쌀했던 가을 밤, 두 번째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그 당시 나름대로 나만의 이삿짐 싸는 룰이 있었다. 그 룰은 바로, '내가 스스로 한 번에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이삿짐 싸기'. 성격이 급한 나는 내 이삿짐을 가지러 왔다 갔다 하는 행동이 싫었고, 그냥 내가 한 번에 다 옮겨 이사를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진 못했다. 물론 가구 하나 내 것이 없었고, 내 이삿짐 중에 가장 컸던 건 선물받은 큰 전기장판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캐리어에 옷가지를 다 넣고, 이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을 정리할 차례. 짐을 싸다가 보니 책상에서 최근 한 달여 동안 쓰지 못했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펼쳐서 보니 최근 한 달 빼곤 그 동안 소화했던 일정들과, 느꼈던 생각들,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잠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때 음료와 커피 맛있게 만드는 레시피 등이 적혀있었다. 음. 잠시 고민 끝에 그 다이어리는 쓰레기봉투 안으로 넣었다. 그땐 기록들이 모두 쓸모없다고 생각했었고, 내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다이어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 중에 가장 아쉬운 물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뭐, 비싼 다이어리는 아니였다. 그 다이어리에 기록되어진 해 말고, 바로 지난 해 겨울. '이거 스타벅스 스티커 다 모았다고 주더라. 나는 필요없으니 너 가지려면 가져.'라며 아는 분이 내게 스윽 내밀었던 하얀색 스타벅스 다이어리.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만약에 내가 그 다이어리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와 조금은 달라졌을까.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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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http://doranproject.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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