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주말에 공휴일까지 더해져 3일을 푹 쉬고 월요일 같은 마음가짐으로 집을 나선 지난 화요일. 이날은 또 한 달에 한 번 그랜드 미팅이 있는 날이라 그랩 안에서 지난주에 미리 만들어 둔 발표 자료를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려보며 회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힘차게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사무실 불이 꺼져있었다. 평소 내가 사무실에 도착하는 순서는 앞에서 4~5번째는 되기 때문에 늘 일찍 오는 직원들이 있기 마련인데 불이 꺼져있다니. 근데 재밌는 건 사람들이 불 꺼진 사무실 안에 있었다는 점. 지문을 찍은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왜 이렇게 캄캄하게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정전이라고. 신기했다. 난 분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고, G층에 있는 카페와 식당에선 평소처럼 불을 환하게 켜고 장사하고 있던데. 들어보니 사무실 쪽 전기가 모두 나갔다고 한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다들 어리둥절하며 한편으론 웃음이 터져 나왔고, HR팀에선 매니지먼트에 전화해서 언제 전기가 들어오는지 물어보기 바빴고, 누군가는 속속들이 도착하는 직원들에게 앵무새처럼 정전이라며 자초지종 설명하고 있었다. 

내 회사 랩탑은 완충이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고, 급한 대로 아이폰으로 회사 메일함을 열어봤다. 특별히 급한 메일은 없었기에 일단 한숨 돌리자 더움이 느껴졌다. 그랬다. 더운 말레이시아에서 정전이란 형광등을 켜지 못하고,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더불어 에어컨을 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치명적이다. 사람들이 점점 모인 사무실은 계속 온도가 올라갔고, 움직이기도 싫을 정도로 금세 더워졌다. 말레이시아의 정전을 내 피부로 처음 느끼고 있던 중 팀즈에 공지가 올라왔다. 건물 전기가 다시 복구될 때까지 재택근무이고, 그랜드 미팅은 목요일로 미뤄졌다는 공지였다. 결국 나는 출근한 지 30분 만에 무거운 회사 랩탑을 들고 다시 회사 문을 나섰고, 덤으로 묘한 자유를 느꼈다. 그랩을 켰는데 이대로 집에 가긴 괜히 아쉬워서 무작정 회사에서 가까운 아는 카페로 목적지를 찍고 그랩을 기다렸다. 사실 그 카페는 예전에 브런치가 별로였던지라 가기 싫었지만, 화요일 오전에 문을 연 가까운 카페는 그곳뿐이었다. 결국 그 카페에 도착해 내가 좋아하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와 크로와상을 주문했다. 날씨는 흐렸고 곧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때. 난 지금 이렇게 테라스에서 여유와 해방감을 즐기며 앉아 있는데. 주문한 커피와 크로와상이 나왔고, 크로와상에 버터를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사실 크로와상은 평범했다) 그냥 내 기분이 좋았던 것이지. 그리고 그 카페는 내게 브런치가 맛없는 카페에서, 좋은 순간을 곱씹을 수 있는 곳으로 다시 재평가되었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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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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