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날 때부터 그녀는 달랐고, 그 다름이 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솔직함과 당당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은밀했다. 그 은밀함이 너의 응시로 자꾸만 깊어졌고, 자꾸만 너를 끌어당겼다. 너는 바싹 마른 들개처럼 그녀를 구하고, 그녀의 삶에 간여했다. 너는 그녀에게로 기울어졌고, 그녀는 너를 버거워했다. 그녀가 마음을 걷어 간 자리에 물길이 생기고, 세찬 물결이 너의 발목을 휘감는다. 비로소 너는 네가 깊은 물속에 빠져버렸음을 깨닫는다. 중심을 잃은 너는 더 이상 그 강을 건널 수 없다. 거닐고, 지나치고, 떠나는 일, 그리하여 어딘가 넓은 나루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범할 간이 건널 섭을 뛰어넘어버렸다. 월요일 새벽에, 너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희미..
수많은 밤들이 있었다. 수많은 낮들이 있었다. 기억해둘 만한 일들, 기억에서 사라진 일들이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희미해진 기억들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지울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한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들이 있었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황금빛으로, 다시 갈색으로 변해가는 들판의 풀들이 있었다. 텅 빈 뼈를 가진 새들이 있었고, 새들의 꿈을 꾸는 조개들과 푸르고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들도 어딘가에 있었다. 어쩌면 조그마한 손으로 모래성을 만들던 아이들, 무심하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바람, 어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던 햇살이 있었다. 찾으려 했던 길들, 기다리는 시간, 가눌 수 없는 열정, 속도를 늦추지 않는 세월, 빛바랜 무정,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진 마음들이 있었다. -황경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