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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285.소설

puresmile 2019. 6. 23. 22:06

*소설

1.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섹스어필이 없어, 라고 그 여자가 딱 잘라 말하는 동시에 그 여자 역시 단정지었다.
그 여자에게 섹스어필이 없어 보였던 가여운 그 남자는 아직도 그 여자의 옆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남자의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남자에게도 여자는 그냥 툭 찔러보고, 아니면 아닌 상대였던 것이라는 것을 여자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사로잡힌 생각때문에 만남에 대해서, 인연에 대해서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끝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이처럼 남은 인생을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여자는 생각한다. 살다보니 인생에서 섹스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도 같은데. 그리고 가끔 남자는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 속에 아련한 기억은 그 여자뿐이였는데.

2.
전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소설 속에만 나올 것 같은 일들이, 나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그런 현실. 계획대로 살아보지만 멀리서 보면 계획대로 전혀 안되는 것이 삶이더라. 우리는 그저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 더 예쁘게 만들기 위해, 조금 더 다독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년 10월을 기점으로 1년 후 여행계획을 세우다보니, 너무 시간이 빨리 가버리는 것만 같아 조금은 두렵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면 세울수록 그 시간이 점점 빨리 내게 뛰어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어느새 뒤돌아보면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렇다고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을 순 없잖아. 시간과의 밀당은 어렵다.

3.
어제, 페이스북을 보다가 마음이 너무 짠한 편지를 읽었다. 희귀병에 걸린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친구의 편지.
(출처: '인하대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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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생에 태어나면, 부디 나를 만나지 말아주라.

안녕. 너에게 건네는 인사가 이제는 조금 낯설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아마 이번 인사가 정말 마지막 일 수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웃는 모습에 반했고 두번째 만났을 때는 따뜻한 온기에 반했고 그렇게 정신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너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더라.
나는 태생이 평범하지 못해 항상 평범한 삶을 원해 왔고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하게 사랑하고 늙어가는 그런 인생을 꿈꿔왔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신은 나에게 너라는 기회를 주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 기회를 잡았고 내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한 일년을 보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동시에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나는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내 자신이 얼마나 기특했는지, 아마 너는 영영 모를테지. 
나는 무굔데 너를 만나 신이 진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틀에 한번 꼴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졌던 그 날, 누군가를 그리 미워해 본적 없는 나는 신을 진심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너무 잘 흘러간다 했던 내 인생에 희귀성 질환, 원인도 고칠 방법도 없는 병이 자리잡았고 그걸로서 내 삶은 평범해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너 없는 밤에 얼마나 많은, 그 쓰디쓴 글자들을 삼켜냈는지. 그렇게나 우는 너를 두고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못되게 구는 것 뿐이라는게 생살을 떼어내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너는 지금도 모른다. 네가 보면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너는 그렇게나 아픈 눈을 하고 이유를 물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사실 수백번 고민했다. 그러나 말하고자하는 그 글자들에 가시가 돋아 내 목구멍을 아주 따갑게 만들었고 견뎌내야할 너를 생각하면 그 가시 돋은 말들을 다시 삼켜낼 수 밖에 없었다.
이왕 쓰는 김에 더 솔직해져 보자면 무서웠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내 곁에 꼭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없는 그 새벽이, 내 코에 호스를 꼽고 몸에 주사 구멍을 3-4개씩 내는 그 순간보다 더 아팠다.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의 너는 곁에 새로운 사람도 있고 내년이면 유학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오늘 사망동의서를 쓰고 왔다. 긴 시간동안의 싸움 끝에 마지막 싸움을 해보려 한다. 매번 수술대에 오를 때마다 쓰는 동의서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미가 달랐다. 동의서 내용을 천천히 읽고 어쩌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네가 제일 생각이 났다. 아니 사실 작은 세포덩어리와 싸우는 기간 내내,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를 잊은 적이 하루도 없다. 
고맙다. 평범하지 않는 내게,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 내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사랑뿐이라고 알려준 너를, 아마 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생에 태어나면 부디 나를 만나지 말아주라. 나는 비가 되고 눈이 되어 종종 너에게 찾아갈테니 너는 그저 행복만 해라. 이제 진짜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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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너는 우리 그때 봤던 영화 김종욱 찾기를 기억할까. 마지막 임수정이 안녕에는 세 가지 안녕이 있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너무 슬프고 후련다고 난리쳤는데, 그때의 너는 이해가 하나도 안된다고 그랬었다.
그랬던 네가 이제는 안녕의 세 가지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한거 같더라. 나를 향한 너의 안녕이, 안녕의 세번째 의미를 갖는 다는 것 쯤은 글을 읽자마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제 너와 내 사이에 몇 안되는 지인들에게서 연락왔었다. 페이스북을 잘 하지 않는 나는 캡쳐된 너의 글을 읽었고 세보진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울었다. 
내 이름, 네 이름, 우리가 만난 곳, 우리의 이야기가 세세히 적혀있지 않았지만 너와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너의 말투, 너의 언어, 너의 문장에 잘 쌓아왔던 모든게 무너져버렸다. 
굳은 살을 만드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살을 파내어 다시 상처를 내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네 글에 수정할 부분이 세 개나 있어서이다. 
첫번째, 나는 너와 내가 헤어졌어야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헤어지고 시간 좀 흘러 알게 되었다. 사실 네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너를 너무 잘 알아서, 네가 한 결정의 칼이 너를 향해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그 칼날을 너에게서 빼내 나를 향해 찌르고 싶었지만 그럼 넌 당장이라고 죽을 듯이 아파할걸 알아서,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해서. 나 자신보다 너를 더 사랑해서. 
두번째, 나는 아직도 너와의 기억을 먹고 산다. 안타깝지만 내 곁에 새로운 사람은 없다.얼마전 네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마음을 표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너때문에 그리고 나때문에. 
세번째, 그래 네 말대로 다음생에는 만나지 말자. 다음생은 네 말대로 하자. 대신 이번생은 내 마음대로 할거다. 나는 마음 먹었고 작정했다.
내일 네가 있는 병원으로 갈 예정이다. 병원과 호실을 말해주지 않으려는 네 측근에게 전화해서 우는 와중에도 또렷히 말했다.
너는 내가 필요하고 나도 네가 간절하다고, 그래서 우린 이번생에 꼭 만나야 한다고. 
이번에는 도망가지 마라. 혼자서 무서워 하지도 마라.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들로 널 놓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 딱 죽기전까지만, 그때까지만 사랑하자. 우리에게 내일이 허락될지 허락되지 않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너 그냥 나랑 오늘을 살자. 
가는 건 내가 할테니 넌 그냥 앞에 선 나를 꼭 안아주라. 그거면 된다. 
이렇게 많은 언어들 사이에 내가 하고싶은 말은 
보고싶다, 
이 네 글자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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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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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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