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20대가 되면 한 번 쯤은 자취에 대한 로망,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런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 밖에서 살 게 된 건,
21살때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춘천에 가서 디자이너언니랑 같이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작은 원룸이나 투룸이 아닌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고, 온전하게 혼자만 사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딱히 자취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그 곳은
어떤 가구를 사다 들여놓거나, 집을 꾸미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직장 주변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을 때도, 
정말 실용적인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후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계기도,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여 이동하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기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오롯이 더 써야 겠다는 그 생각만으로 방을 구했다.
잠을 자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공간일 뿐이였다.

월세를 내고 사는 공간은 완전한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매우 컸지만
뒤늦게나마 내가 오랜 시간을 어떤 공간에서 보낸다고 실감이 났을 때,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형태라는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 공간에 조금씩 정을 붙여 인테리어를 한답시고 한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자석들이나 사진들을 냉장고에 붙인다거나,
작은 화병을 사서 꽃을 꽂아 둔다거나,
아끼는 엽서와 좋아하는 작가의 달력을 벽에 붙이는 게 다였다.
나중에 어떤 집이 될 지 모르겠지만 온전한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에서 살고 있을 땐 
(어쩌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구일지도 모르는) 테이블부터 골라봐야지. 

2.
아무리 비싼 가구들과
누가봐도 예뻐보이는 인테리어가 아주 잘 된 집에 살고 있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내'가 불행하다면.

3.
공간도, 사람도 모두 경험해볼수록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지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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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

1.
말레이시아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입 안 어디든간에 염증이 먼저 난다.
생리 직전에도 나고,
잠이 부족할 때도 나고,
술을 자주 마셨을 때도 나고,
그냥 피곤할때도 나고.
입에 염증이 생기면 일단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신호인 걸 깨닫고는
따뜻하게,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고 
과일도 많이 먹고, 침대에도 일찍 눕는다.
그리고 내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입 안에 바르는 연고가 놓여있다.
저 연고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산 약이였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뭔가 불안하다.
다른 약들은 다 깊은 서랍 속에 놓여 있는데
저 연고만은 내가 마치 부적처럼 보기만해도 안심이 된달까.

2.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미움을 사고.
내 안에 곪아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가만히 회상해본다.
그 때 난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이제라도 외쳐볼까 싶어
마음이 달싹 하지만서도
가만히 묻어두어야 하는게 맞는 걸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마음에 묻어두어야 할 것들인걸까.
시간 속에 방치해둔채로 그대로 곪아버린 그 것들은
내 마음 속에 제멋대로 흉이 되어 남아있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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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만 봐도

1.
종종 살다보면
바라만 봐도 귀여운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자꾸 귀여운 모습들을 더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사랑스럽고 오래 보고 싶어서
자꾸만 초등학생처럼 시비걸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
영원히 귀여움을 잃지 말길-

2.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예쁜 잔에 커피가 나오면 마시지 않아도 배불러
오늘 마침 딱 그랬거든
진짜 인생 통틀어 가장 예쁜 커피잔과 커피잔 받침이였어
차가운 라떼를 시키려고 하다가
그냥 따뜻한 라떼를 주문한 것이 천만다행이였어
내가 그 커피잔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야

3.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좋은 점은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풍경을 한도끝도없이 볼 수 있다는 것.
맑고 푸른 하늘, 초록초록한 잎이 잔뜩 달려있는 나무들 따위 말이야.
적어도 내겐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없는 날+하늘이 맑은 날+초록 나뭇잎을 보는 날이 무척이나 귀했거든.
그런 날엔 차 안에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날이 많아서
좋아하는 것들을 보기 위해선 마음이 급했어
눈에 담기 바빴고, 카메라에 담기 바빴어

4.
작년에 뉴욕갔을 때 면세점에서 (잘못) 주문한 향수가 있었어
심지어 작은 병도 아니었는데,
신나게 면세점가서 향수 받아들고 
액체라 아예 뜯질 못하니까
14시간 정도 날아서 뉴욕에 도착한 후
가랑비 오는 뉴욕을 우산도 없이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마라톤 부스에서 번호표 받고, 타미스 사무실 찾아서 미리 예약한 바우처들 받고,
에스컬레이터따윈 없는 전철역 계단을 낑낑대고 오르내리다 
드디어 도착한 첫 호텔에서 향수를 뜯었지.
그 향수는 그 당시로부터 2년 전에 사용하던 향수였는데
2년 전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산 것이였거든.
그래서 잔뜩 기대하고 포장을 뜯어서 뿌렸는데 이게 뭐람.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향이였지.
한끗차이로 같은 라인 중 다른 향수를 주문한거야.
병 색도 너무 비슷해서 (투명도만 살짝 다름)
면세물품 받았을 때도 감쪽같이 몰랐지.
뉴욕 여행 내내 뿌리려고 사서 다른 향수는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그 향수를 10일 내내 사용했어.
그리고 은근 향이 익숙해져서 그 뒤로 8개월 정도 그 향수를 계속 썼지.
뉴욕에서 처음 향수를 뜯었던 날을 떠올리면서.
드디어 어제, 새로운 향수를 샀어.
아직 그 (일명)뉴욕 향수는 절반 정도 남아있는데 말이야.
새 향수는 뉴욕 향수와 아예 정반대 느낌의 향이여서
고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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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사이

1.
가까이 붙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서로가 한없이 외로워지지. 외롭다고 생각하지.
특히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성격, 성향 등의 차이로 갈등이 생길 때.
그땐 아무리 착 달라붙어있더라도(사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손을 내밀어도 잡아지지 않을 것처럼 마음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지.
그 순간을 견디면서도 우리는 외로움을 묵살했고
그 시간을 버티면서 그렇게 인연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

2.
가산에서 회사를 다녔을 때
출근하기 전 매일같이 영어학원에 갔었다.
당시 중급반 선생님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지만(한 살 많은 언니였지)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고,
배우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려웠었다.
항상 그 선생님은 날 보고 리싸!라며 LISA의 SA에 억양을 더 주면서 말했었는데.
내가 영어학원 고급반으로 올라간 이후 이 선생님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1년 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친구처럼 사적으로 만났다.
물론 딱 한 번. 
곧 내가 출국을 앞두고 있었고 그녀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니.
며칠 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점원에게 이름을 말해주니,
컵에 내 이름이 LISSA라고 쓰여있었다.
고의인지, 잘못알아들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영어학원 선생님 억양이 생각났다지.
그래서 그녀에게 연락해봤다.
그녀는 결혼 후 부산으로 내려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 직장에 TO가 나서 취직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젊어보이는 면접관이 틱틱거리며 질문을 던졌고
안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그 자리에 합격하지 못해서 더 기분이 나빴던 그녀.
지금은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도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고, 때문에 서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 친하지 않아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
세상엔 별별 사소한 관계들이 많이 존재한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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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계획

1.
완벽한 계획이랍시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계획 속에 날 제멋대로 넣어두고,
왜 자신의 계획대로 하지 않느냐며,
되려 뭐라고 하는 그런 멋없는 사람들.
나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야기 해 본 적은 있는지.
내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나 있는지.
(사실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거절할 것은 뻔했겠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의 계획 속 나는 낯설다.
꼭,
이 책 다 읽고 방청소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방청소하라고 잔소리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2.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하기.
누군가 떠오른다면 바로 연락해보기.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꼭 초콜릿 사가기.
이번 주말에는 로컬 친구들과 저녁 먹기.
눈여겨봤던 카페 가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와 양치만 한 후 머리 질끈 묶고 러닝하기.
다음날엔 회사에 한라봉차 가져가기.
뭐 그냥 이런 소소한 것들만 잘 지켜도 충분하다.
크고 길게 보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으니 말이다.
오늘 누가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숨을 놓아버릴지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님에서 남이될지도 모르고
혹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3.
내년 봄엔 뉴욕에 갈 수 있을까.
겹벚꽃이 가득한 뉴욕을 보고싶다.

4.
꼭 다 온 것처럼 보여도
새 길이 생겨.
재밌다고 이해할래.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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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시간

1.
시간 참.
내가 아는 언니는 벌써 40대가 되어서 40대 기념으로 여행을 갔다 왔고
아직도 중학생 같은 동생은 30대가 되었어
30대가 된 동생은 벌써(는 사실 아니지) 결혼(해도 무방한 나이긴 하지) 얘길 꺼내고
가족들은 애지중지 생각하는 동생을 보내기 싫어해
과거에 날 붙잡기 위해 먼 길을 쫓아왔던 한 남자친구는 벌써 애가 둘이고
함께 강의실에서 웃던 귀여운 후배는 브라이덜샤워를 하고 있네
반 년 전 뉴욕에 같이 간 친구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로 얼룩진 뉴욕을 그리워하고 있고
추억은 힘이 없다는 너의 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들은 잊혀지고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은 해가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휘해
저 멀리 메트로폴리탄에서 건너건너 말레이시아까지 온 달력은 힘없이 넘겨지고
그나마 위로가 되는 사실은
앞 날이 지나온 날보다 망망대해 같다는 거야

2.
내 평균 1km당 페이스는 5분하고도 20-50초를 왔다리갔다리하는데
요즘 노래 한 곡에 5분도 되지 않아서 한 곡이 끝나고 두번째 곡이 시작하고도
한참은 들어야 하더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듣는 노래는 그렇게 짧을 수가 없고 휙휙 넘어가는데
러닝할때 듣는 노래는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곡 길이도 비슷하고 심지어 비트는 더 빠른데 말이야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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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1.
어느날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적당히 마실 만큼 마셨고,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시기 싫었던 여자친구는
남자친구를 블랙잭 할 수 있는 펍에 데려갔다.
평소에 심리전에 강한 편이였던 그 남자친구는 딜러와 심리전에 재미붙이며
블랙잭에 눈을 떴고, 매번 따고 잃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는 인연이 다해 헤어졌고,
헤어졌지만 잠시동안 서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로 지냈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는
각자 친구와 그 펍에 갔다가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고,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을 하고 술을 마셨다.
이후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는 더이상 친구로 지내지 않을 정도로 등을 돌렸고,
남자친구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소개해준 그 블랙잭 펍을 평일에도 퇴근 후 자주 가곤 했다.
하루는 남자친구가 회사에 입고 오지도 않던 정장을 입고 왔고,
남자친구의 회사 동료는 오늘 무슨 날이냐며, 갑자기 왜 멋있게 입고 출근했냐고 물어봤다.
남자친구는 오늘 자기가 자주 가던 블랙잭 펍에서 블랙잭 대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한테 꽤 중요한 대회라고 하면서.
그 남자친구는 아주 가끔 헤어진 여자친구의 생각에 잠기긴 하지만 
곧 딜러에게 패를 더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2.
가끔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될 때
종이를 작게 오린 후 몇 장 그 곳에 깨알같이 메뉴들을 각각 적어서
보이지 않게 두 번 접은 후 바닥에 던지든, 통에 넣든 잘 섞이게 한 후
하나를 뽑아보자.
근데 그걸 나랑 하면 어차피 뽑은 메뉴는 결국 먹지 않는다는 게 함정.

3.
망설이고 고민될 땐 그냥 하고 말지 뭐.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는 나처럼.

4.
도박을 하고도 운명인 줄 착각하는 사람처럼.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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