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1.정우가 새 직장에 취업을 하고 한 달이 되었으려나. 무심코 지갑을 열었는데 못 보던 종이가 보였다. 꺼내보니 '내 첫 번째 명함은 우리 연희꺼지. 우리우리 연희 제일 좋아하지'라는 포스트잇을 붙여둔 본인의 명함이 들어있었다. 이런 깜찍한 면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 자체가 너무 기뻐서 정우가 준 그 명함은 처음 발견한 고대로 늘 내 지갑에 모셔두고 있다. 하지만 미니백을 즐겨 쓰기 때문에 카드지갑만 들고 다니므로 결국 명함이 들어있는 지갑은 지금 방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다. 언젠가 다시 원래 지갑을 들고 다니는 날이 오겠지. 2.어릴 적부터 나는 약간 이런 마음이 있었다. 무언가에 대한 강박이나 혹은 믿음, 피할 수 없는 루틴 같은 걸 만들어두면 훗날 그 무언가가 나를 실망시키거나, 그것을 지..
*김밥19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을 차례가 오는 밤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1층에 있는 고봉민 김밥을 가서 하루하루 김밥 종류를 바꿔가면서 김밥을 사 먹었다. 어떤 날엔 돈까스 김밥, 어떤 저녁엔 참치 김밥, 어떤 밤엔 치즈 김밥. 고봉민 김밥의 김밥은 늘 알이 크고 재료가 꽉 차서 두툼했기 때문에 주문할 때마다 밥을 적게 넣어달라는 말을 보탰다. 김밥을 사들고 올라와 나밖에 없는 조용한 곳에서 김밥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시답지 않은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렸다.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며 그저 관성에 이끌리듯 시간을 보냈다. 월급 날만을 기다리고, 또 한 달을 채우고, 또 월급 날만을 기다리고. 그래도 내 생애 처음 웃고 인사하며 좋은 마무리를 잘 지은 때였다. 누가 원인이든 늘 도망치..
*환생1.점심시간에 산책하는데 같이 산책하는 회사 동료가 물었다."연희씨는 다음 생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동일한 생각을 혼자 해본 적이 있던 나는 단숨에 대답했다."아니요. 저는 전생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의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자아를 가진 내가 태어날 것 같긴 해요. 과거에도 그랬을 거고. 근데 그 자아들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어요."2.수많은 단톡방 중 하나의 단톡방에서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연희씨는 해산물을 엄청 좋아하는데, 진짜 이러다가 다음 생에 물고기로 태어나겠어요."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전 물고기보다 차라리 범고래로 태어나고 싶어요."3.어디선가 그런 글을 봤다.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기에도 존재하고, 내리는 비에도 존재하고, 우..
*독후감3주 전, 집 앞 교차로를 지나가는데 언뜻 한 플랜카드가 눈에 띄었다. 시에서 독후감 대회를 연다는 것! 한번 해볼까 싶다가 시간이 없겠지 싶어서 외면하고 잊었다. 며칠 뒤 정우가 카톡으로 '연희 한번 나가봐'라는 말과 함께 하나의 이미지를 보내왔다. 그것은 바로 내가 며칠 전 봤던 독후감 대회 플랜카드와 동일한 내용의 배너였다. 아, 이 독후감 대회는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집에 미리 빌려 놓은 책 3권 중 한 권을 골라잡았다. 가장 빨리 읽으려고 얇은 책을 골랐는데 내가 빌린 책 중 가장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나 싶다. 그나마 몇 챕터 중 하나의 챕터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 내용으로 독후감을 쓰려고 생각한 뒤 독후감 내용을 어떤 식으로 쓸지 며칠을 메모하며 구상했다. 샤워하면서도 생각하고, 점..
*박빙엊그제 테니스를 쳤는데 1:5로 지고 있었다. 근데 그날따라 정말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아서 눈에 쌍심지 켜고 공이 노려보며 한 점 한 점 따라갔다. 신기하게도 한 세트, 두 세트 이기더니 결국 5:5로 아름답게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테니스는 치면 칠수록 마음가짐에 따라 몸이 반응하는 것 같다. 게임에 간절하지 않거나 그냥 마음 편히 치면 공도 마음 편히 홈런으로 날아간다. 근데 마음가짐을 조금 더 단단하게 하고 제대로 쳐보자는 마음으로 임하면 자세도 더 잘 잡히고 공도 잘 나간다. 치면 칠수록 너무 어려운 운동이야.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은 운동이다. 곧 있으면 롤랑 가로스 결승에 시너랑 알카라즈가 나온다! 너무 박빙일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알카라즈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중이다. 알카라즈를 보..
*식빵일주일에 보통 5번 이상. 술을 많이 마시는 주엔 3번 정도. 출근시간보다 두 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우리는 커피를 마신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생두를 사다가 직접 집에서 로스팅을 한 다음, 아침마다 그라인더로 갈아서 1년 반 넘게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를 마셔왔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드립백도 종종 애용한다. 신혼여행 때 우리가 볶은 커피를 코사무이에서 아침에 마시고 싶어서 가기 전, 드립백 키트를 산 뒤 집에서 열심히 드립백에 커피를 넣고 고데기로 실링했다. 그렇게 실링된 드립백 열 한 개(원래 열 두 개를 만들었는데 정우가 그새를 못참고 하나를 바로 마셔서 홀수다)를 가져가서 2개 빼고 다 마셨다. 드립백을 산 적은 있어도 직접 만든 적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훌륭했다. 집에 아직 드..
*청량함요즘 나무에 초록 잎들이 무성하고, 여기저기 새빨간 장미들이 담벼락에서 빼꼼 고개를 들고 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눈이 즐겁고, 길을 걸을 때마다 시야에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들어와서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매년 생각하는 것이지만, 또다시 새삼스럽게 '겨울보다는 여름이 최고지', '역시 여름이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습도가 낮아 청량하고, 하늘은 파랗고,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이는 날씨는 사랑이다. 겨울에는 진한 레드와인에 손이 갔는데, 여름에는 레드보다는 화이트를 찾게 되고, 이번에 코사무이에서 리즐링 와인에 눈을 뜨는 바람에 리즐링 와인에도 눈이 가고, 손이 간다. 오늘은 오랜만에 와인 쇼핑을 했는데, 날씨 영향으로 샴페인까지 사게 됐다. 상자 가득 와인들을 담아오니 올여름 대비는..
*풍경좋아하는 풍경들이 늘어날 때 마치 곳간에 곡식이 가득해진 것처럼 마음이 풍족해진다. 이번 여행에서도 잊지 못할 풍경들을 마주했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랑 멋진 풍경이라며 함께 감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보다 감상을 더 잘하는 그는 분명 내가 모르는 풍경들을 더 담았을 것이다. 나보다 아침에 더 먼저 일어나서 혼자 산책하는 중 나무에서 떨어져 물에 둥둥 떠있는 릴라와디 사진을 보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가오는 무더운 여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풍경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며 잘근잘근 안주 삼을 수 있는 날들이 올 것이다. -Hee ····················································································도란도란 프로젝트..
*비키니1.하루 종일도 아닌 길어봤자 반나절 정도일까 싶은 결혼식 날이 가까워질수록 모든 신경이 그 날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 뒤 3주라는 시간 동안의 여행보다 고 몇 시간의 중요성이 더 컸던 것이지. 사실 분하기도 했다. 고작 그 하루가, 그 몇 시간이 나를 이렇게 여러모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신경 쓰게 하는 것이. 심지어 내가 주인공이었던 날이기에 모든 것을 내 계획대로 해야 직성에 풀려서 1부터 100까지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디데이 전 날 자기 직전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내일 눈 뜨자마자 모든 것이 실전이고, 이제 내 손안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즐기자'라고. 그렇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 종일 웃고 울고 떠들며 최대치로 즐긴 나는 밤 10시가 되어도 배고픈 지 몰랐다. 10..
*예감"그렇게 우리 좋게 만나고 헤어졌잖아. 그리고 난 다음날 연락이 바로 올 줄 알았지. 근데 안 오는거야. 그래서 '음, 그렇구나'라고 (혼자 머쓱해하며) 그렇게 넘어갔는데 그다음 날 바로 연락이 오더라고? 그래서 난 좋았어.""근데 나도 바로 다음날 연락이 올 줄 알았어. 근데 안 오더라고. 그래서 그다음 날 바로 연락해 봤지.""아, 그랬어?""그리고 우리 (다시) 만나서 걷고, 먹고, 그랬을 때도 뭔가 나는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계속 뭐가 있다면서 먼저 간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아, 이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생각했지.""아, 그때 나 친구랑 스터디해야 하는 시간이라 (그 시간을 미룰 수 없어서) 제일 먼저 만나자마자 말했지. 맞아, 맞아. 아 그게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어?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