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김

도란도란 프로젝트 2021. 10. 24. 16:49

*김

중고등학교 때 엄마는 아침마다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일분 일초가 분주한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아침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도, 동생도 딱 사이즈를 보니 식탁에 앉아서 밥 먹을 시간 따윈 없다는 것을 눈치채시곤 흰쌀밥을 조미김에 돌돌 말아 작은 접시에 수북하게 쌓아주셨다. 나랑 동생은 이쪽방에 갔다가, 저쪽방에 갔다가, 화장실에 갔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김에 말은 밥을 하나씩 집어먹었다. 최근 갑자기 그 단출한 김밥이 생각났다. 마침 최근 밥을 조금 많이 해서 전기밥솥에 밥이 있었고, 조미김도 있었기에 밥을 퍼서 김에 싸봤다. 그냥 밥을 먹다가 젓가락으로 조미김 집어서 밥과 함께 먹을 때랑은 또 달랐다. 그건 그냥 김이고 밥이고 아무렇게나 입에 욱여넣으면 그만인데, 예전에 엄마가 싸준 그 김밥처럼 동그랗게 말려면 젓가락만으로는 절대 그 모양을 만들 수 없었다. 무조건 한 손에 김을 올려놓고 그 위에 밥을 올린 후 손가락들을 이용해서 조물조물 김밥 모양을 만들어야 했다. 온 손바닥에 조미김 기름이 다 묻었다. 윽. 처음엔 괜히 이렇게 먹나 싶었다가 막상 김에 밥을 다 말고, 하나씩 집어먹어보니 학창 시절에 등교 준비했던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엄마도 자기 출근하기 바쁘면서, 온 손바닥과 손가락에 기름을 다 묻혀가며 열심히 김밥을 싸준 거였어. 엄마도 출근하기 바빴으면서. 힝.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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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예전 '환경과 인간'이라는 교양에서 교수님이 그랬다. '너네들, 특히 여자들은 임신하기 전이라면 더더욱 일본에 가지 마라.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다' 그때 마침 러시아에서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해 배우고 있었고, 너무 끔찍한 장면들을 많이 보는 바람에 엄청 겁을 먹었다. 하루는 일본 교토에 다녀온 친한 친구가 나보고 강력하게 그곳에 꼭 가야 한다고, 내가 정말 좋아할 만한 곳이 많다고 추천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마 앞으로도 일본에 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촌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의 결혼 상대는 생각지도 못한 일본인이었고, 과거에 사촌동생이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만났다고 했다. 순간 내가 너무 일본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살고 있고, 일본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주변에 많은데. 일본인 남자친구와 결혼한 사촌동생은 현재 일본에 가서 살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 방사능 피해가 얼마나 있는진 알 수 없지만 부디 동생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난 언제쯤 일본에 갈 수 있을까. 친구가 그렇게 내게 추천한 교토나 수도인 도쿄 등 후쿠오카만 가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후쿠오카에서 나오는 농작물같은 식재료 등이 일본 전역으로 유통되면 결국 일본 전체가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다가도 ,주변 사람들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걸 보면 괜찮겠거니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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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바구니

4년 전에 코타키나발루에 갔을 때 SaltxPaper라는 문구점에서 마치 과일 바구니처럼 과일 모양 스티커들을 세트에 팔길래 (스티커치곤) 나름 거금을 주고 샀다. 다시보면 솔직히 그렇게 유니크하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은데 그땐 왜 그 스티커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갔는지. 유일하게 그 문구점에서 산 스티커가 그 과일 모양 스티커들이라 스티커 파일에 넣어두고 아끼고 아껴 쓰다 결국 지금까지 단 한 개의 과일도 꺼내 쓰지 못하고 구매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실 스티커는 쓰라고 있는 건데.. 마음이 많이 가는 스티커는 어디에 쉽사리 막 붙이지도 못하고, 아까워하는 내 꼴이 웃겨서 오늘은 다이어리에 붙여보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뒤로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문구점에 언제든지 다시 갈 수 있다는 것! 그땐 다른 스티커들도 잔뜩 사 와서 아끼지 말고 마구마구 붙여야지. 아끼면 다 똥이야!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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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한 것인데, 고작 그것들 중 하나를 겨우 해준 후 생색냈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네가 드디어 바라는 것을 해냈다니. 앞으로도 항상 한결같았던 그 모습 그대로 절대 변치 않길 바라고 바란다. 늘 불만이 가득한 채로, 뭐라도 변화가 있거나 변하려고 한다면 거부반응을 잔뜩 보이고, 항상 지나간 것들을 후회하면서,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 그 순간 나와는 달라서 재밌었다고 느꼈지만, 결국 투덜거림으로 꽉 찼던 생활을 했던 사람아. 

2.
내가 예약한 오지은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술에 취해있던 우리 세 사람은 신나게 떼창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마음처럼 느껴졌었지. 그렇게 나는 그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로 셋이 다같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친해보였던 남은 그 둘도 결국엔 멀어졌다지. 난 그때 너희들이 참 좋았어.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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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인하다

처음 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아주 약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뿌리치지 못한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어. 알고 지낸 기간, 친밀감의 깊이, 단순히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네가 더 잘 알고 있었겠지. 근데 난 네가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정말 차라리 내가 그랬으면 그랬지, 넌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렇게 시작한 네 이야기를 들은 후 처음엔 괜히 어떤 이야기들만 들려오면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고, 혹시라도 흔히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들이 네게 생길까 봐 혼자 얼마나 머리가 쭈뼛했는지 몰라. 마치 예전에 네가 그 새벽에 나 때문에 문자 한 통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차라리 내가 정의의 사도처럼 나서서 모든 것을 망쳐놓아야 했을까라는 정의감인지, 의무감인지 모를 생각이 들기도 했어. 또 한편으로는 내가 고민하고 있을 이 시간에 그냥 누구라도 그렇듯 자연스럽게 멀어지길 바라기도 했어. 과거 전공 시간에 배운 '인지 부조화'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르면서,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겉으로는 내가 그걸 묵인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 그때 내가 뭘 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이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아직은 모르겠어. 그저 난 네가 안전하길 바랄 뿐이야. 너의 바람처럼.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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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

입술은 하나인데 왜 립스틱은 수만 가지일까. 심지어 입술에 한 번에 여러 색을 바를 수도 없고,(그라데이션은 하지 않으니 생략하고) 한번 꽂히는 색이 있으면 한동안 그 립스틱만 손에 가는 내 성향으로 인해 서랍 속에서 제대로 빛 한번 보지 못하고 버리는 립스틱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내 피부색은 하늘 아래 하나뿐이니 어울리는 색도 한정적이었다. 하루는 새빨간 계열의 립스틱이 지겨워져서 나도 청순한 느낌의 연한 분홍색 립스틱을 발라볼까 싶었지만 얼굴이 뭔가 칙칙해지고, 생기 있어 보이지도 않아서 그제서야 웜톤이니, 쿨톤이니 하는 소리를 믿게 되었고, 또 하루는 무턱대고 기분대로 백화점의 그 노란 조명 아래서 핑크색으로 알고 샀다가 집에 와서 다시 발라보니 거의 자주빛의 가까운 립스틱이어서 경악한 적도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이유들로 그냥 있는 립스틱 다 쓰고 난 후 새로 사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이놈의 뷰티 브랜드들은 쉬지도 않지. 계절이 바뀌면 늘 립스틱이 새로 출시되고, 어떤 브랜드는 텍스쳐가 달라졌다며 고운 립스틱 색깔들을 선보이고, 뷰티 인플루언서들은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입술이고, 팔뚝이고 립스틱 발색을 앞다투어 보여주니 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어제도 어떤 브랜드의 립스틱 발색을 보고 혹해서 후기를 한참 찾아보다가 다시 요즘 마스크쓰고 다닐 수 밖에 없는 현실에 현타가 와서 보던 창들을 모두 닫아버렸다. 이러다 조만간 또 검색창에 립스틱 모델명을 검색해보겠지..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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