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

썸을 타고 있거나 연애를 막 시작하는 커플에게 개봉하는 공포영화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데이트 코스가 될 수 있다.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새파란 하늘을 지나 노을 질 무렵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가을의 한강 산책, 적당한 소음과 그리 밝지도, 그렇다고 매우 어둡지도 않은 카페에 앉아 마주 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안주 따윈 필요 없이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씩 비우고 사람들의 붐비는 어느 골목길을 걷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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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1.
처음 가계부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앱스토어에서 몇 개의 가계부 앱을 다운받고 사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떤 가계부 앱은 로딩 자체가 오래 걸렸고, 어떤 가계부 앱은 (내겐) 불필요한 UI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가계부 앱은 그냥 못생겼었다. 그렇게 여러 가계부 앱을 거치고 나서 겨우 한 가계부 앱에 정착을 했다. 아이콘과 테마를 소소하게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귀여운 앱. 또 그런 자그만 기능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몇 년째 늘 그 가계부 앱만 사용 중이다. 나의 가계부 사용 목적은 다음 달에 빠져나갈 카드값이 얼마나 되는지, 여러 계좌에 현재 얼마의 잔금이 남아있는지, 어떤 계좌에 얼마를 더 이동시켜야 하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위함이다. 어떤 글에서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은 다신 쳐다보지 않을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던데, '오답노트'란 표현은 공감이 되지 않았지만 '쳐다보지 않을'이란 표현은 공감됐다. 나 역시 이미 소비한 지출 목록은 쳐다보지 않는다. 내겐 '만약 후회하거나 자제했어야 하는 지출 목록이었다면 애초에 아예 지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늘 깔려있기 때문이다. 아이콘만 봐도 무거워 보이는 각종 금융 앱에 접속하는 시간, 수많은 인증들을 거쳐야 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이 귀여운 가계부 앱은 충분히 내게 의미 있다. 

2.
하나의 계좌에 서로 돈을 모으고, 같이 하는 모든 소비들을 그 하나의 계좌에서 관리하자는 결정을 내렸을 땐 내가 정말 그 사람과 가까워졌다는 착각을 했다. 그 뒤에 어떤 속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채, 그냥 그 하나의 계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관계가 영원할 것이란 큰 착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 계좌는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했고, 비용은 내 신용카드에서만 꾸준히 빠져나갔다.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됐다. 그래도 다시 돌이켜보면 내 돈을 쓴 것에 대해 후회는 없고, 마음이 후련하긴 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면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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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Do It

그냥 하면 되는 건 역시 달리기가 최고. 나이키의 캐치프레이즈는 언제 들어도 기가 막힌다. 일단 운동화만 신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달리기의 절반은 일단 성공한 거다. 나머지 절반은 거의 대부분 알아서 따라오기 마련. 그렇게 맨날 그냥 집 주변을 뛰다가 올해 처음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10km flag off 타임은 새벽 7시. 그런데 집에서 대회장까지 차로 40~45분이나 떨어져 있어서 전날 일찍 잠들었다. 코로나 이후 정말 오랜만에 실제 마라톤에 참여하는 거라 설레고 떨리고, 최근 몸 컨디션이 안 좋아서 걱정도 많이 됐다. 어떻게 보면 잔뜩 엄살을 떨었지. 일어나서 바나나를 먹고 소화시키려고 2시간 전, 5시에 일어나자마자 바나나를 먹었고 가는 길 포함 대회장에 당연히 화장실 가기 어려울 것 같아서 물도 최소량으로 마셨다. 주최였던 가민 말레이시아 인스타그램을 보니 이미 풀코스랑 하프코스는 출발한 상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대회장에 도착했고, 이곳저곳 사진도 많이 남겼다! 내가 푸트라자야를 이렇게 마라톤 대회 덕분에 와보다니. 나름 말레이시아에선 큰 대회라 10km, 5km 참가자들도 정말 많았다. 비타민제, 운동복 등 이런저런 부스들도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대회 날만 독점으로 가민에서 제품들을 엄청 할인해서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여서 가민 이벤트부스엔 사람들이 바글바글. 앞엔 사회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자, 다들 준비됐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유명한 인사(제임스 총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난 처음 들어봄)가 하프코스에 출전했다,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하며 시작하기 직전 분위기를 달궜다. 예전에 몇 번 큰 마라톤 대회를 나간 경험이 있었는데, 시작 후 1km까지 사람들이 같은 도로에 엄청 붐비기 때문에 출발 라인에서 멀어질수록(뒤쪽일수록) 내 페이스를 내지 못하고 사람들을 피해서 지그재그로 뛰어야 하는 상황을 많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앞쪽으로 나갈 수 있는 만큼 나가서 출발을 했다. 열심히 제자리에서 점프하면서 웜업도 하고, 괜히 셀카도 찍어보고 하니 어느새 출발시간 1분 전!!!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피어올랐다!!! 총소리와 함께 드디어 출발할 수 있게 되자 너무 신나서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 우연히 옆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봤는데 다들 심각했다. 난 정말 재밌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는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그냥 계속 혼자 웃으면서 뛰었다. 다행히 이번 대회에선 초반 1km까지 소위 길막당하는 일도 없었고, 많이 지그재그로 달릴 필요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서 사람들을 추월하며 열심히 달렸다. 일주일 전 아는 지인이 페이스메이커를 해줘서 5분 초반 페이스를 낸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번 대회 때 그 페이스가 다시 나왔다! 믿기지 않았지만 행복해서 또 웃으면서 뛰었지. 여러 경험자들의 말에 따르면 대회 땐 내 앞에서 달리는 한 사람을 골라 내 페이스메이커라고 생각하고 달리라고 하는데, 난 한 사람을 고르기가 왠지 모르게 싫었고 그냥 주변 경치만 바라보며 달렸다. 게다가 도로 컨디션이 왜 이렇게 좋아? 마치 광화문 광장에서 하는 마라톤처럼 도로가 넓고 잘 닦여 있어서 진짜 달릴 맛이 났다! 이번 대회를 푸트라자야에서 한 것은 진짜 신의 한 수라고 생각됐다. 푸트라자야는 한국의 세종처럼,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인구들을 조금 더 분산시키기 위해 행정기관들을 이전한 곳으로, 말레이시아의 성공한 계획도시로 꼽히는 도시다. 그래서 마치 수원의 광교, 또는 분당의 어느 신도시처럼 인도를 포함한 인프라나 주변 조경도 최상급이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마라톤이라니. 뛰면서 또 행복해서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예전에 서울에서 10km 마라톤 뛸 땐 7~8km 때 진짜 힘듦이 느껴저서 괴롭게 뛴 적이 있었는데, 이번 마라톤 대회 땐 단 1초도 힘들거나 괴롭다고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날씨가 화창하고 주변도 내가 좋아하는 초록 초록하고 울창한 나무들과 반짝반짝 빛이 나는 호수, 그리고 뻥 뚫린 도로 덕분에 마냥 행복했다. 살짝 아쉬웠던 건 한국이나 뉴욕에서 마라톤을 나갔을 땐 대회 서포트해주는 경찰 아저씨, 자원봉사자들, 스탭들 등등 모두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달렸는데 이번엔 다들 피곤해 보였다는 점. (아마 새벽 3시에 풀코스 참가자들이 출발했기 때문에 이분들은 부스설치부터 작은 것 하나하나 준비하기까지 거의 밤을 새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하 그나마 급수대에 있는 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친구가 'let's go! go! go!'라고 크게 응원해 줘서 힘이 더 났고, 마지막 500m 남기고 180도 도는 구간이 있었는데 내가 500m 남았다는 사인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신나서 '와!!!!'하니까 그 500m 사인 옆에 서있던 경찰 아저씨가 같이 '와!!!!'해줬다. 그래서 또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 그렇게 웃으면서 행복하게 뛰다 보니 어느새 결승선을 통과했고! 기록은 3년 전 뉴욕보다 5분이나 늦어졌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게 나와서 아주 만족스러운 대회였다. 2주 뒤엔 집 바로 밑에서 하는 또 다른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데, 무척 기대된다! 아, 오늘은 정말 모처럼 행복한 날이기 때문에 다이어리에도 좋아하는 스티커를 잔뜩 붙여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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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회사엔 대표 빼고 나와 한국인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직원은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유일한 한국인은 나뿐이다.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크게 말레이시안 차이니즈와 말레이시안들로 나뉘는데 보통 말레이어로 대화를 많이 하기 때문에 가끔씩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종종 아는 말레이 단어들이 나오기도 하고, 대화하는 뉘앙스로 어떤 내용인지 파악할 순 있지만 아예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아서 그럴 때마다 초반엔 영어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봤다. 나도 너네 대화에 끼고 싶은데 영어로 말해달라 이거지. 그런데 몇몇이 누가 봐도 속닥거리면서 이야기할 땐 물어볼 마음도 생기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근데 그 중 한 명이 나중에 몰래 내 뒷담화를 했다고 말해줬지. 처음엔 황당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해대길래 뭐라고 할까 싶다가도, 일단 난 어른이니까 참아보자는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엔 그들끼리조차 서로의 뒷담화를 해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엔 전 회사의 말레이 친구와 이야기하던 도중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걔네 말레이지? 원래 말레이 애들은 그래.'하는 씁쓸한 대답을 들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뒤에서 뒷담화를 잘하고,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게 종특이라는 듯이 말하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말레이 애들이 이야기하는 차이니즈는 더 웃기다. 완전 배려 없고 말도 남 앞에서 막 한다고. 음. 그것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여러모로 말레이시아의 단면을 또 한 번 느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뒷담화하는건 마찬가진데,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다른 점이라면 말레이 사람들은 그 뒷담화한 이야기들이 돌고 도니까 그게 웃겼다.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심지어 대표가 했던 남의 뒷담화까지도) 전 직원에게 다 돌고 돈다. 쉬쉬한게 없이 꼭 그 중 한 명이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전하고, 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또 전하고. 비밀이란 없는 곳. 그래서 차라리 남의 뒷담화를 안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누구 들으라고 하지 않는 이상. 웃기다, 모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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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고 배우는 깨달음이 오래간다.

2.
아주 괜찮은 곡들을 발견했을 때 오는 기쁨은 마치 내 자산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 인생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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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이렇게 대화가 안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을 한 것 같긴 한데(혹은 반대로 상대방이 그 의중을 잘 전달했을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에고들이 잔뜩 뭉쳐있는 것처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다반사였고, 거기에 감정까지 섞여들어가는 바람에 늘 최악의 대화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제시한 방법들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던지. 싸워서 이기려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꼭 싸워서 (특히 본인이) 이겨야 끝이 나는 대화로 인해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는 금새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는 점점 짧아져 갔고, 사라져갔다. 덩달아 남아있던 객체에 대한 애정과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시간들에 대한 미련도 사라져갔다. 특히 지난 노력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버리니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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