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차 조수석에서 내려 첫 발을 내디뎠던 그 동네는 내게 마냥 설렘의 공간이었다. 태어나서 부모님이랑 같이 지내다가 처음 이렇다 할 독립을 한 곳이기도 하고, 지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지역, 그 동네에 간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었던 곳. 내 눈엔 이미 '신남'의 필터와 '설렘'의 필터, 그리고 '새로워서 더 흥미로움'의 필터가 골고루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언덕도, 조금 뭔가 휑한 느낌도, 오래된 상가들도 다 좋았다. 사실 그곳에서 2-3개월 살았으려나.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 살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동네의 추억들이 진하게 몸에 배었다. 그 동네를 떠난 이후에도 한참을, 10년이라는 긴 시간도 넘게, 그 동네만 생각하면 온갖 감정이 다 느껴졌고, 그 뒤에..
그럼그렇지 잘살고말고
*농구 초등학교 때 날 연자방이라는, 지금 들어도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부른 친구가 있었다. 내 기억에 서울 어딘가에서 전학 온 그 친구는 얼굴이 참 뽀얗고, 하얬고, 마치 미용실에서 갓 매직이라도 하고 나온듯한 쭉쭉 뻗은 생머리가 절대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살집이 조금 있어서(아마 젖살이었겠지) 웃을 때 굉장히 순해 보이던 그녀는 가을이 되자멋쟁이처럼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형사같아보여서 내가 맨날 강형사라고 불렀다. 하루는 학교 끝나고 늦은 오후쯤 강형사랑 나는 다시 학교를 향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강형사가 농구를 하자고 제안했고, 의욕이 넘치던 나는 단숨에 오케이했다. 강형사가 농구공을 들고나왔고, 우리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농구대 앞에서 열심히 공을 튀..
*2024년 나뭇잎이 점점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계절 아래 있다. 조금 있으면 낮에도 입김이 폴폴 나고, 씻고 난 후 수면 양말을 주섬주섬 챙겨 신고, 산미가 없는 원두를 찾는 추운 계절이 왔다고 느낄 즈음, 여기저기서 새로운 다이어리가 나왔다고, 내년 다이어리를 장만하라고 메일이 오겠지. 고르고 골라서 산 포근한 색의 코트들을 외면한 채 롱패딩만 골라 입을 그때, 우리는 어디서 웃고 있을까. 어디서 뛰어놀고, 어디서 껴안고, 어디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어디서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어디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을까. 아마 5분만 걸어도 땀이 줄줄 나는 장소들을 추억하며 같이 커피 향을 맡고 있겠지. -Hee ···············································..
*나약함 1. 다가오는 볼을 라켓으로 팡! 때리려고 했지만 팅!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내 라켓과 몸을 볼 때 너무 나 자신이 약하게 느껴져 한도 끝도 없이 심란하다. 하지만 옆에선 약한 게 문제가 아니라 임팩트의 정확성, 임팩트의 타이밍이 문제라고, 힘의 문제가 아니라고 열심히 말해주지만, (글로, 유튜브로, 그리고 사람들의 자세를 봐오면서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괜히 내 하찮은 몸뚱어리를 탓하는 것이지. 오늘도 나는 그 스윗스팟인가 뭔가 하는 곳에 공을 맞추려고 노력할 것이고, 공을 끝까지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치기 편한 자세에서 치려고 조금 더 움직이려고 노력해야지.. 2. 혼자 생각하다 보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나약해지는 것 같아. 생각의 ..
*춤 그때도 지금처럼 일교차가 큰 가을이었다. 자켓이나 가디건이 필수인 밤에 S와 엄청 좋아했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와인에 빠져있던 S의 취향이 떠올라 S에게 '와인 마실래?'라고 물었더니, '그래!'라는 대답이 1초도 안되어 돌아왔다. 와인 보틀과 홍합 요리를 주문했고, 밀렸던 수다를 잔뜩 풀어대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더니 앞엔 빈 보틀과 그릇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적당히 취했는데 술은 더 마시기 싫어서 배부른데 나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어느새 S와 나는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목적지는 호텔 지하에 있는 클럽! 심지어 그 클럽은 이제 젊은 나이대는 거의 가지 않는, 블로그 말을 빌자면 '옛날 잘나가는 오렌지 족이 갔던' 그런 클럽이었다. 어둡지만 휘황찬란하고 느껴지는 조명 사이..
*기다림의 끝 한때 사랑의 표현이, 사랑 고백이 금기였으려나 싶을 정도로 삭막한 때가 있었다. 어떤 이는 마치 먹이를 주듯 특별한 날에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래봤자 거의 한 번이었나, 에라이)했고, 어떤 이는 처음 만났을 때 달콤한 말로 나를 현혹시키더니 그 이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그 안주함에 속아 평생 삭막하게 살 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달달하고 올망졸망 표현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스타일인 줄 알았다. 주변에서 늘 누구를 만나든 서로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만나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 '난 애정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표현을 잘 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
어렵다 모든 마음들이 어려워 내 맘 하나 몰라주는 그런 마음들도 어렵고 충분히 예쁘게 말해줄 수 있는데 밉게 말해주는 것도 미워
*장바구니 장바구니에 하나씩 하나씩 가을, 겨울옷들이 쌓이고, 사라진다! (아마 결제했기 때문이겠지) 더운 나라에 살다가 3년 만에 제대로 가을, 겨울옷을 살 생각에 이미 한여름부터 신났었다. 껄껄. 포근한 색감의 니트들이랑, 원래 있던 가죽자켓 디자인이랑은 완전히 다른 디자인의 가죽자켓, 그리고 한동안 쳐다도 안 봤던 모직 치마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니, 이렇게 니트 색들이 예뻤어? 코코아? 크림? 오트? 이런 생각으로 하나 둘 집어넣어 보니 니트 부자가 될 것 같아서 결제 직전 정신 바짝 차렸다. 사실 작년 겨울에 일 때문에 2개월 정도 한국에 있긴 했었다. 그땐 다시 갈 생각으로 예전에 입고 넣어둔 옷장 속 깊은 곳에 있던 겨울옷들 꺼내서 어찌어찌 입다가 다시 한국을 떠났었는데. 이번엔 정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