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20대가 되면 한 번 쯤은 자취에 대한 로망,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런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 밖에서 살 게 된 건, 21살때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춘천에 가서 디자이너언니랑 같이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작은 원룸이나 투룸이 아닌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고, 온전하게 혼자만 사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딱히 자취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그 곳은 어떤 가구를 사다 들여놓거나, 집을 꾸미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직장 주변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을 때도, 정말 실용적인 용도 그 ..
*염증 1. 말레이시아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입 안 어디든간에 염증이 먼저 난다. 생리 직전에도 나고, 잠이 부족할 때도 나고, 술을 자주 마셨을 때도 나고, 그냥 피곤할때도 나고. 입에 염증이 생기면 일단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신호인 걸 깨닫고는 따뜻하게,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고 과일도 많이 먹고, 침대에도 일찍 눕는다. 그리고 내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입 안에 바르는 연고가 놓여있다. 저 연고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산 약이였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뭔가 불안하다. 다른 약들은 다 깊은 서랍 속에 놓여 있는데 저 연고만은 내가 마치 부적처럼 보기만해도 안심이 된달까. 2.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미움을 사고. 내 안에 곪아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가만..
*바라만 봐도 1. 종종 살다보면 바라만 봐도 귀여운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자꾸 귀여운 모습들을 더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사랑스럽고 오래 보고 싶어서 자꾸만 초등학생처럼 시비걸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 영원히 귀여움을 잃지 말길- 2.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예쁜 잔에 커피가 나오면 마시지 않아도 배불러 오늘 마침 딱 그랬거든 진짜 인생 통틀어 가장 예쁜 커피잔과 커피잔 받침이였어 차가운 라떼를 시키려고 하다가 그냥 따뜻한 라떼를 주문한 것이 천만다행이였어 내가 그 커피잔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야 3.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좋은 점은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풍경을 한도끝도없이 볼 수 있다는 것. 맑고 푸른 하늘, 초록초록한 잎이 잔뜩 달려있는 나무들 따위 말이야. 적어도 내겐..
*먼 사이 1. 가까이 붙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서로가 한없이 외로워지지. 외롭다고 생각하지. 특히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성격, 성향 등의 차이로 갈등이 생길 때. 그땐 아무리 착 달라붙어있더라도(사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손을 내밀어도 잡아지지 않을 것처럼 마음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지. 그 순간을 견디면서도 우리는 외로움을 묵살했고 그 시간을 버티면서 그렇게 인연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 2. 가산에서 회사를 다녔을 때 출근하기 전 매일같이 영어학원에 갔었다. 당시 중급반 선생님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지만(한 살 많은 언니였지)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고, 배우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려웠었다. 항상 그 선생님은 날..
*계획 1. 완벽한 계획이랍시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계획 속에 날 제멋대로 넣어두고, 왜 자신의 계획대로 하지 않느냐며, 되려 뭐라고 하는 그런 멋없는 사람들. 나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야기 해 본 적은 있는지. 내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나 있는지. (사실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거절할 것은 뻔했겠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의 계획 속 나는 낯설다. 꼭, 이 책 다 읽고 방청소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방청소하라고 잔소리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2.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하기. 누군가 떠오른다면 바로 연락해보기.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꼭 초콜릿 사가기. 이번 주말에는 로컬 친구들과 저녁 먹기. 눈여겨봤던 카페 가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와 양치만 한 후 머리 질..
*시간 1. 시간 참. 내가 아는 언니는 벌써 40대가 되어서 40대 기념으로 여행을 갔다 왔고 아직도 중학생 같은 동생은 30대가 되었어 30대가 된 동생은 벌써(는 사실 아니지) 결혼(해도 무방한 나이긴 하지) 얘길 꺼내고 가족들은 애지중지 생각하는 동생을 보내기 싫어해 과거에 날 붙잡기 위해 먼 길을 쫓아왔던 한 남자친구는 벌써 애가 둘이고 함께 강의실에서 웃던 귀여운 후배는 브라이덜샤워를 하고 있네 반 년 전 뉴욕에 같이 간 친구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로 얼룩진 뉴욕을 그리워하고 있고 추억은 힘이 없다는 너의 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들은 잊혀지고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은 해가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휘해 저 멀리 메트로폴리탄에서..
*도박 1. 어느날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적당히 마실 만큼 마셨고,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시기 싫었던 여자친구는 남자친구를 블랙잭 할 수 있는 펍에 데려갔다. 평소에 심리전에 강한 편이였던 그 남자친구는 딜러와 심리전에 재미붙이며 블랙잭에 눈을 떴고, 매번 따고 잃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는 인연이 다해 헤어졌고, 헤어졌지만 잠시동안 서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로 지냈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는 각자 친구와 그 펍에 갔다가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고,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을 하고 술을 마셨다. 이후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는 더이상 친구로 지내지 않을 정도로 등을 돌렸고, 남자친구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소개해준 그 블랙잭 펍을 평일에도 퇴근 ..
*마늘빵 1. 케이크 먹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로 말했더니, 어느 날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었고 마른 오징어 먹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로 말했더니, 어느 날 냉동실에 마른 오징어가 있었다. 2. 친구랑 삼거리 빵집에서 마늘빵 산 후에 지금은 사라진 전통카페에 가서 전통차와 함께 먹던 마늘빵도 좋았다. 3. 몇 년 만에 마늘빵이 너무 먹고 싶었던 어느 날, 운동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마트에 갔어. 네 생각이 나서 네가 좋아할 만한 다른 빵들도 잔뜩 집었지. 이것저것 마구 집어 들다 보니 내 두 손으로 겨우 들 정도가 되었고, 너를 만나러 가는데 넌 마중 한 번 안 나오더라. 혹시나 싶어 내가 빵을 먹고 싶다고, 마트에 가고 있다고, 많이 살 거라고, 별의별 말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눈치가 없었던 건지..
*걱정 1. 인스타 프로필에 쓴 글이 너무 와닿아서 팔로우 한 배우(인줄 사실 몰랐다)가 있다. 그 프로필에는 '완벽한 계획은 필요없어.해 지금.'라고 적혀있었다. 2. 평소에 있던 걱정도 날려버리고도 남았을 난데, 누구한테 '걱정하는 법'을 조금은 배워버려서 요즘엔 나도모르게 걱정을 하긴 한다. 근데 항상 이렇게 걱정해봤자 해결되지도, 좋아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내가 왜 걱정을 하고 있냐며 나를 나무란다. 배우고 싶지 않은 부분을 배워버려서, 잊고 있는 중이다. 3. 내 기억 어딘가에 숨어있던 그 당시 찍은 사진이 내 꿈 속에 나왔어. 심지어 네 사진도 나왔지 뭐야. 맥북 포토부스 필터 중 넙죽이처럼 나오는 필터를 이용해서 찍은 그 사진. 난 진짜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소주 정말 기분 좋을때만 하나도 쓰지 않은 술. 불광동에 출장갔을때 불광시장에 있던 옛날 순대국 집으로 (나머진 원래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라 나만 잘 모르던) 8명정도가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10월 말이라 쌀쌀했지만 순대국집 안에는 솥에서 육수 끓이는 냄새가 솔솔 나서 그런지 공기가 후끈했고,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순대국 냄새를 맡으니 자연스럽게 생각나던 술.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 소곱창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목청껏 떠들며 홀짝홀짝 마시던 술. 말레이시아에서는 9천원정도 하는 술. 예전에 아는 선배가 평택역 앞 홍콩반점에서 알려주던 칭쏘비율이 지금까지도 인생비율이 되서 항상 그 비율대로 맥주와 섞어 먹는 술. 신입사원때 우리팀만 야근을 했는데 일이 끝나고 대표가 순대국집에서 한 잔씩 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