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나는 별거 아닌 것에 대해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주차장 안쪽에 절대 해가 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핀 고운 색의 튤립,
내가 사는 공간에 처음으로 (나를 위한) 정수기라는 것이 들어왔던 순간,
거진 10년동안 여러 곳을 전전하며 지내던 나와 늘 함께 챙겨다녔던 맥주모양의 커다란 저금통을 깨는 날,
외출하기 전 예쁘게 단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르고 짬을 내어 찍는 내 모습,
처음으로 외국에서 인터뷰 가는 중에 내심 떨리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고 신기해서 찍은 회사건물,
길을 가다가 어느 집 주인 할아버지가 담벼락에 써 놓은, 무단방뇨에 대한 경고의 글과 함께 걸려있던 무시무시한 가위,
공항에서 나를 놓칠라 눈을 크게 뜨고 한 사람, 한 사람 주의깊게 보면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모습,
무더운 여름에 빨갛게 핀 장미,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키가 큰 나무에 걸려있는 초록잎 따위들.

그리고 나는 시시때때로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추운 겨울에 귀마개를 하고 등산을 갔던 모습,
친구가 자취방을 이사해서 집들이를 간 후 그 친구의 옷을 빌려 잠옷삼아 입은 채 밤에 산책하던 모습,
아무 날도 아닌데 예쁜 옷을 입고 카페에 책을 챙겨 갔지만 핸드폰을 하는 모습,
오랜만에 동생과 아파트 헬스장에 가서 런닝머신을 뛰기 전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
샤워 후 앞머리를 핀으로 올리고, 머리도 위로 높게 묶은 후 부모님집 쇼파에 기대서 다리를 아빠처럼(정말 기억도 안나는 어렸을 적에 찍힌 사진을 보면 아빠가 길게 다리를 뻗고 포개서 앉아있었다) 꼬은 후 앉아있는 모습,
대학교 기숙사 내 방 작은 책상에서 내 몸통만한 커다란 노트북으로 카모메식당을 보던 모습.

2.
정말 평범한 날들이지만 그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에 더 남겨두고 싶은 욕심이 많다.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때가 되면 그게 또 소중해서 사진을 찍자고 하고,
굳이 내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사진을 찍지 않는 친구를 만날 때, 혼자 사진을 찍자고 유난을 떠는게 싫어서 그 날은 사진없이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또 뭐라고 말도 못 꺼내고 괜히 아쉬워서 후회되는 때가 있고,
남자친구가 굳이 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거나 웃기거나, 또는 그냥 남겨두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 사진들을 같이 꺼내보며 이땐 이랬지, 저땐 저랬지, 하면서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과거의 시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시간과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과 지내고 싶다.
무심한 순간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면 곧 의미가 되는 순간이 되고,
누가 보면 정말 별일 없는 날에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순간이 된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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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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