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1. 나의 병아리(1)
어언 12년 전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저것 관심있어하고,
넘치는 에너지를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모든 것들을 흥미로워 하는 내게,
하루는 친구Y가 하나의 사진을 보내줬다.
바로 병아리 뒷모습.
그냥 뒷모습도 아니다.
병아리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뒷모습이다.
마치 나라고.
그냥 그 병아리를 보면 나같다고 했다.
작은데 걸음은 꽤 빠르고 여기저기 잘 쏘다니는게
꼭 나같다고 하면서 말이다.
쫑쫑거리며 돌아다니는 그 에너지를
요즘은 그 친구에게 주고싶다.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그 에너지가 양분이 되어
친구가 활짝 필 수 있도록 말이다.
여전히 어여쁘게.
앞으로도 어여쁘게.

2. 나의 병아리(2)
내 가방 속에는 항상 병아리가 들어있다.
친구N이 준 귀여운 병아리.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
내게 웃으면서 내밀던 병아리.
알리익스프레스를 애용하던 친구N은
자신의 에어팟케이스를 검색하다가
내 에어팟케이스까지 사버렸다고 했다.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반영한
샛노란 병아리케이스다.
사실 실리콘케이스를 선호하진 않지만
친구N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소중할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도 때가 타도록 주구장창 사용하는 중이다.
병아리케이스가 에어팟 몸체와 뚜껑이 분리되어있는 케이스라
아주 가끔씩 에어팟 뚜껑을 열면 뚜껑케이스가 빠질 때가 있다.
그럴때면 대머리병아리 같다.
그것마저 귀여워.
친구N이랑 만나기전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가지고 다녀야지.
(특히 병아리 머리(뚜껑)부분...)

3. 엄마의 병아리
엄마: '대부도 포도 한상자 사옴... 연희생각 같이 먹으면 더욱더 맛잇을텐대~~~^^ㅎ'
나: '내 몫까지 드세용!'
엄마: '연희 과일좋아하잖아!!! 내가 과일 젤 좋아하는거 같아... 연희하구~~~^^'
나: 'ㅋㅋ 맞앙 그래서 난 자두사왔어! 납작복숭아 다먹고!'
엄마: '그러게! 냉장고에 과일없으면 먹을게 없는 거 같아!ㅋ'
나: '요플레도 사다두고 요구르트도 !'
엄마: '맞아...항상 잇어야해 ㅎ'

(식성을 똑 닮은 엄마와의 대화 중)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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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1.
그놈의 자격.
내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다면
곧이 곧대로 듣지 않을 자격도 있다.

2.
마음대로 연락할 자격이 있다면
마음대로 대답하지 않을 자격도 있다.

3.
그 신발은 싫다고 몇번을 말해도
눈치를 못채고 있는 건지,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말하다보면 말하면서 기분이 나쁜
내가 싫어서 이내 입을 다문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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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1.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벽증이다.
내 블라우스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
내 하루에 대부분은 키보드를 칠 일이 많은데,
그때 내 옷 팔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이
너무 싫다.
닿지 않게 하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위에 무조건 사무실용 긴 소매 겉옷을 입거나
팔만 끼우고 키보드를 친다.
손목을 아예 들고 칠 수는 없으니.
그 향수를 뿌린 팔목 안쪽이 어딘가에 닿는 게 너무 싫다.
소매가 짧은 옷을 입어서 팔목이 그대로 드러나 차가운 책상에 닿는 것이 싫고,
긴 소매 옷을 입더라도, 그 긴 옷조차 닿는게 싫다.
그렇다고 내 책상은 항상 닦아서 먼지 한 톨 없을 텐데,
그래도 싫다.
에어컨이 추워 가져다놓은 사무실용 옷은 
내 팔목과 그날 입은 내 긴 옷소매를 지켜주는 데에도 쓰인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이렇게 강박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어느샌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이상한 결벽증.

2.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중요한 곳에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길 바랐는데
희미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직은 눈에 휘이 보이는 얼룩.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길 기다렸던
얼룩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식은땀이 나고, 숨이 막히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그런 얼룩.

3.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 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 뿐이네

페르소나, '밤을 걷다' 중

4.
그동안 되게 우스웠던 건
내 옷도 아닌 그 옷에 누군가 무언가를 흘렸고
세탁을 여러 번 했는데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런데도 나는 그 옷을 옷장 속에 여러 해나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너무 참담하기 그지없네.
어디에 예쁘게 입고 나갈 옷도 아니면서.
얼룩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나 겨우 입고 나갈 정도였는데.
그 옷이 뭐라고. 5년도 넘게 가지고 있다가 버렸냐는 말이야.
사실 돌이켜보면 옷의 주인인 너의 마음과는 달리
난 그 옷을 꾸역꾸역 열심히 입어가면서
어떤 풍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날 스스로 보고 싶었나 봐.
이제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서로에게 긁히고 긁혔던 부분들이
저 깊숙한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무의식까지도 꿋꿋하고 싶었거든.
어떻게든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었거든.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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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지다

1.
다림질을 못하겠다.
어떤 블라우스를 세탁기에 빨면 
매우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졌던데.
다림질 그게 뭐 어렵냐 하겠지만
내겐 어려워.. 
그래서 구겨진 블라우스 3-4개를
집 앞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도 필요 없고 그냥 다려달라고만 했는데
다행히 다려준다고 했다.
세탁소 직원이 나보고 옷걸이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집에 옷걸이 많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게 큰 실수였다.
약속한 날 블라우스들을 찾으러 가보니
곱게 다려진 블라우스들이
큰 세탁 봉투 안에 접혀져서 (^^) 밀봉이 되어있었다.
집에 와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 블라우스를 꺼내었더니
역시.. 몸통 부분은 접혀진 모양대로,
팔 부분들은 또 다른 모양대로 구겨져있었다.
헤헤.
난 왜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긴 걸까.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진 블라우스들은
다시 옷장 속에 고스란히 걸려있다.
스팀다리미 작은 건 예전에 써봤는데 그건 그거대로 어렵던데..
음.
모르겠다.

2.
사실 그때 답장을 하지 못한 건,
내가 네게 또 빠질까 봐.
근데 넌 그 이후로 다시 연락하지 않더라.
단 하나의 메시지도 없더라.
넌 너대로 마음이 구겨졌을지도 모르지.
난 나대로 마음이 구겨졌고.

3.
천장만 보고 누워있던 적이 있었지.
너무 어이없고 허무하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바깥 날씨는 이렇게 좋고 반짝이는데
나만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게
너무 화가 났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속에 화가 많이 나서
사람이 화병이 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깟 감정 상한 게 뭐 대수라고
누구 하나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곧추세우며
서로를 마구 물어뜯으며
그렇게 어느 여름날을 보낸 적이 있었지.
여름날이 오면 하고 싶었던 모든 계획들은
다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이 아까워서 속이 타들어갔었지.
그땐 고민이 많았다. 
그때만 그런 것인지,
또는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4.
그렇게 들으라고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고 
베이스를 튕기지만
애써 외면한다.
외면해버린다.
완벽하게 구겨진 내 모습이
그 음악에 투영되어 보일까 봐.
그 모습이 거울처럼 내 앞에서 서성거릴까 봐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만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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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1.
사실 그 침대에 누워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부모님은 내 침대를 정돈하신다.
철마다 이불을 바꾸고,
동생 전기장판 바꿀 때 내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도 덩달아 바뀐다.

2.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훨씬 쉽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아는 것이 힘이 될 땐 
정말 엄청 많은 것을 알아야 힘이 되는데,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땐
조금만 몰라도, 저것만 몰라도, 이 사실만 몰라도 
약이 될 때가 많다.

3.
침대의 사이즈가 어떻든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싱글이면 충분)
근데 퀸사이즈, 킹사이즈를 쓰다보니 큰 사이즈가 좋긴 좋네..

4.
어느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미처 묶은 머리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워버려서
머리가 배겼다지.
그래서 누워서 머리끈을 뺀 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는 날이 부지기수.
그래서 내 침대엔 항상 머리끈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플러스로 앞머리 위로 올릴 때 쓰는 헤어핀까지..)
얘네들이 내 침대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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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20대가 되면 한 번 쯤은 자취에 대한 로망,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런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 밖에서 살 게 된 건,
21살때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춘천에 가서 디자이너언니랑 같이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작은 원룸이나 투룸이 아닌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고, 온전하게 혼자만 사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딱히 자취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그 곳은
어떤 가구를 사다 들여놓거나, 집을 꾸미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직장 주변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을 때도, 
정말 실용적인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후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계기도,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여 이동하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기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오롯이 더 써야 겠다는 그 생각만으로 방을 구했다.
잠을 자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공간일 뿐이였다.

월세를 내고 사는 공간은 완전한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매우 컸지만
뒤늦게나마 내가 오랜 시간을 어떤 공간에서 보낸다고 실감이 났을 때,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형태라는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 공간에 조금씩 정을 붙여 인테리어를 한답시고 한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자석들이나 사진들을 냉장고에 붙인다거나,
작은 화병을 사서 꽃을 꽂아 둔다거나,
아끼는 엽서와 좋아하는 작가의 달력을 벽에 붙이는 게 다였다.
나중에 어떤 집이 될 지 모르겠지만 온전한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에서 살고 있을 땐 
(어쩌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구일지도 모르는) 테이블부터 골라봐야지. 

2.
아무리 비싼 가구들과
누가봐도 예뻐보이는 인테리어가 아주 잘 된 집에 살고 있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내'가 불행하다면.

3.
공간도, 사람도 모두 경험해볼수록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지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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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

1.
말레이시아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입 안 어디든간에 염증이 먼저 난다.
생리 직전에도 나고,
잠이 부족할 때도 나고,
술을 자주 마셨을 때도 나고,
그냥 피곤할때도 나고.
입에 염증이 생기면 일단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신호인 걸 깨닫고는
따뜻하게,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고 
과일도 많이 먹고, 침대에도 일찍 눕는다.
그리고 내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입 안에 바르는 연고가 놓여있다.
저 연고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산 약이였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뭔가 불안하다.
다른 약들은 다 깊은 서랍 속에 놓여 있는데
저 연고만은 내가 마치 부적처럼 보기만해도 안심이 된달까.

2.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미움을 사고.
내 안에 곪아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가만히 회상해본다.
그 때 난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이제라도 외쳐볼까 싶어
마음이 달싹 하지만서도
가만히 묻어두어야 하는게 맞는 걸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마음에 묻어두어야 할 것들인걸까.
시간 속에 방치해둔채로 그대로 곪아버린 그 것들은
내 마음 속에 제멋대로 흉이 되어 남아있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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