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태세

1.
유일하게
 높은 하이힐과 빨간 립스틱이 없어도
머리 질끈 묶고 앞머리 한 올도 내려오지 않게 바짝 올리고,
맞은편 코트에서 날아오는 공이 어디로 튀어 오를 지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노려보는 눈까지 장착하면
전투태세 완료인 곳은 바로 테니스 코트 위!

2.
프레젠테이션 하루 전 날
10번 이상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한 적이 있었다.
중간중간 호흡이 들어가는 포인트,
손을 가리키는 포인트,
이야기하면서 다음 슬라이드로 자연스럽게 넘기는 포인트까지
단 1초라도 방심하지 않도록 실전처럼 연습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내가 연습한 모든 것을 쏟아냈고 결과도 대만족.
연습도 연습이지만, 연습으로 인해 조금씩 쌓여가는 자신감이
전쟁터에선 큰 무기가 된다.

3.
다음날 깜짝 생일파티를 해준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내 생일이 꽤 늦은 편이여서
미리 몇 번이나 깜짝 생일파티를 내가 주도해서 해주었기 때문이였다.
사실 파티라고 해도 별 건 없다.
그냥 케익 사오고, 불 붙이고, 상대방이 방심하는 틈에
생일 당사자 이외 동료들과 케익을 들고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당사자는 놀라고, 초를 끄고, 감사의 말을 한다.
보통 단순히 Thank you 라고 하는데, 꽤나 짧아서 다들 더 길게 말하라고 권한다.
이 당사자가 내가 되는 것이지.
사실 한국어로 하면 열 마디고, 백 마디고 술술 내뱉을 수 있지만
여긴 영어를 쓴다.
누가 들으면 웃기겠지만 전 날 초를 불고 할 이야기를 미리 준비해갔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 친구들이 생일파티를 해줬고, 난 몰랐다는 듯 초를 불고
먼저 고맙다고 말했다. 
마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더 스피킹을 하라고 다들 말했고,
나는 사실 준비하지 않았던 것처럼, 미리 준비했던 이야기를 술술 이야기했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다보니 사실 꽤 길었다지.
그렇게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맞이한 내 생일.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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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1.
언젠가 마트에서 생망고를 처음 먹고 인상썼던 그 사람들은
처음엔 망고에 뼈대가 그렇게 굵은 지도 몰랐었는데
이제는 선뜻 적지 않은 돈을 주고 해외에서 왔다는 망고를 선물한다.

2.
정말 어렸을 적에 친구들이랑 술을 먹은 후
친구네 집 2층 침대에 누워있다가 큰 숙취로 인해 새벽에 깬 적이 있다.
그 때 친구네 집엔 망고주스가 있었는데,
자기 직전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입이 텁텁할 즈음
그 망고주스가 얼마나 맛있던지.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지 뭐람.
그 날 이후 술 먹은 다음 날 아직 술 기운이 느껴질 땐
망고주스를 찾았다.
몸 안에 있는 술들을 몽땅 다 색도 맛도 진한 망고주스가 덮어버리는 느낌이랄까.

3.
망고가 단 줄도 몰랐던 그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망고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제일 당도 높은 망고를 구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직도 무엇이 제일 당도 높은 망고인지 모른 채 헤매고 있다.
언제쯤 우리가 달콤한 망고만 딱딱 골라낼 수 있을까.
색만 언뜻 보고 제발 맛있어라, 하고 바라면서
운 좋게 그토록 찾던 망고가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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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

살면서 확신이 든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순간들을 여러 번 겪어왔다.
확신도 기대의 일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함부로 확신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았다.
괜히 기대의 감정을 넘어 확신까지 가게 되면 정말 큰 실망이 다가올까 봐 말이다.
겉으론 확신에 가득찬 척, 담담한 척, 떨리지 않는 척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동공 지진이 일어났는지.
특히 사람의 마음속은 더욱 알 수 없고, 상대방 말고 나조차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확신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와 더불어 확신한다는 사람의 말도 믿기가 어렵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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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1.
내 시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라식이나 라섹 등 교정을 위한 수술을 할 만큼의 용기는 없다. 벌써 렌즈를 착용한 지 17년 정도 된 것 같다. 중학교때부터 콘텍트렌즈-하드렌즈를 지나 이번엔 한달용 콘텍트렌즈를 사용중이다. 물론 출근하거나 외출할 때, 운동할 때만 착용하고(러닝할 땐 제외) 집에 오면 무조건 제일 먼저 렌즈부터 뺀다. 눈이 나쁜 사람들은 다들 알다시피 렌즈나 안경을 착용한 직후엔 시력이 평소보다 순간 더 나빠진다. 안그래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눈이, 렌즈를 빼고 나면 더욱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갖고 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조명마저 어두워버리면 너무 답답해진다. 그래서 집에선 웬만하면 항상 밝게 불을 켠다. 누군가는 불을 끄고 미미한 조명빛을 켜고 지내는 것을 선호하지만, 눈이 좋지 않은 내겐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말레이시아 집은 한국처럼 아주 밝은 형광등이라기보다는 노랗고 은은한 빛이어서 처음에 적응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이제는 은은한 불빛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집에서 불을 다 끄고 작은 조명만 켜놓는 건 못하겠더라.

2.
그래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만 보던 사람을 환한 곳에서 보는 게 사실 익숙하진 않더라. 어두운 조명 아래에선 없던 감정도 생기는 마당에, 환한 조명 아래에선 마치 환상이 깨지듯 있던 감정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그 사람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만 찾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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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꼭 필요한 것들도 사지 못하게 했던 한 줌의 걱정
이제는 이름도 까마득한 내 첫 에프바이 페라가모 향수
수다도 떨고, 계획도 세우고, 팔찌도 만들던 우리 동네 카페
늘 현명한 선택만 할 것만 같았던 어떤 삶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밤
속도를 더 줄일까 말까 고민했던 페달 밟던 순간들
찬 바람이 불 때쯤 동네에 사는 친구와 만나 함께 붕어빵을 먹던 순간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욱 관심이 없었던 희대의 라볶이 레시피
제일 깡말랐었을 시절에 신나게 주문했던 밀크팥빙수 

홍대에서 이젠 먹을 수 없게 된 히비의 앙카케
가을에 연차를 내서라도 꼭 가야했던 프로젝트 온더로드
고작 한 번이지만 진한 추억으로 남은 나의 작은 카페
특히 돈 앞에서 크게 들렸던 머리 굴리는 소리
막간을 이용한 테라스 영어교실
언제라도 네겐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과 오만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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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죽

집에서 엄마가 삼계탕까진 아니고 닭을 통째로 삶은 후
김이 조금 빠지면 꺼내서 살을 발라주셨다.
그러면 나랑 동생은 소금과 후추, 그리고 깨를 섞은 종지에
닭고기를 콕 찍어서 야금야금 먹기 바빴지.
그리고 양이 적은 나는 닭고기가 맛있어도 절대 배부를때까지 먹지 않았다.
왜냐면 마지막에 남은 닭고기를 잘게 찢어서 끓인 닭죽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지.
집에선 닭죽 먹고 싶다고 엄마한테 한 마디만 지나가듯이 해도
엄마는 그 말을 기억하곤 그 날 저녁이나 다음날에 생닭을 사오신 후 뚝딱 해주셨다.
근데 자취한 이후로 닭죽이 생각나서 밖에서 사먹으려고 하면 왜 이렇게 발이 안떨어지는지.
본죽에 가도 삼계죽은 비싼 죽에 속했다. 그러다보니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엄마밥은 언제나 최고다.
아빠와 동생은 종종 싱겁다, 짜다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실 요리에 아주아주 뒤늦게 재미를 붙인 엄마였기 때문에
간이 안 맞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근데 나는 싱거운 것은 싱거운대로 좋았고,
밍숭맹숭한 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그냥 엄마가 해준 음식은 다 좋아했다.
식탁 앞에선 불평없이 먹는 나를 엄마가 제일 좋아했다.
나중에 한국가면 엄마한테 닭죽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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