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프라이데이 1. 말레이시아는 세일을 너무 자주하다보니까 전혀 세일답지 않다. 매달 4월 4일, 7월 7일 같은 월과 일의 숫자가 동일한 날에는 물론이고 힌두교, 이슬람교, 차이니즈 홀리데이를 기념하고 크리스마스도 빼놓을 수 없고, New Year은 더더욱 빼놓을 수 없고. 이렇게 잦은 세일들이 많다보니 막상 세일이라고 해서 들여다보면 딱히 큰 세일이라고 할 만한게 많이 없다. 물론 아주 가끔 파격적인 세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너무 드문 일이고 그냥 자잘한 10~20링깃 세일이 기본.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세일이?'라고 놀라며 세일 품목을 찾아봤지만 이제는 상술도 많고, 딱히 따지고보면 몇 푼 아끼는 것 같지도 않아서 무덤덤하다. 2.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것 만큼 지옥이 있을까. ..
*양파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끌렸다. 자기만의 세계도 좋고, 자기만의 철학도 좋고,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그런 사람. 너무 빤한 사람은 재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재미없었다. 그러려면 내가 아무것도 없으면 안될 것 같아서 닥치는 대로 흡수한 적도 있었다. 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첫 페이지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것이 중간 페이지라면 중간 페이지부터 읽었고, 마지막 챕터였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의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을 때쯤 만났던 사람들은 상상외로 정말 흥미로웠다. 평소 내 주변에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분위기와 공기들. 그들 사이에선 내가 외계인이였다. 내가 새로운 세계에서 어느날 그들의 세계로 뚝 떨어진 그런 느낌. 그..
*전투태세 1. 유일하게 높은 하이힐과 빨간 립스틱이 없어도 머리 질끈 묶고 앞머리 한 올도 내려오지 않게 바짝 올리고, 맞은편 코트에서 날아오는 공이 어디로 튀어 오를 지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노려보는 눈까지 장착하면 전투태세 완료인 곳은 바로 테니스 코트 위! 2. 프레젠테이션 하루 전 날 10번 이상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한 적이 있었다. 중간중간 호흡이 들어가는 포인트, 손을 가리키는 포인트, 이야기하면서 다음 슬라이드로 자연스럽게 넘기는 포인트까지 단 1초라도 방심하지 않도록 실전처럼 연습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내가 연습한 모든 것을 쏟아냈고 결과도 대만족. 연습도 연습이지만, 연습으로 인해 조금씩 쌓여가는 자신감이 전쟁터에선 큰 무기가 된다. 3. 다음날 깜짝 생일파티를 해준다는..
*망고 1. 언젠가 마트에서 생망고를 처음 먹고 인상썼던 그 사람들은 처음엔 망고에 뼈대가 그렇게 굵은 지도 몰랐었는데 이제는 선뜻 적지 않은 돈을 주고 해외에서 왔다는 망고를 선물한다. 2. 정말 어렸을 적에 친구들이랑 술을 먹은 후 친구네 집 2층 침대에 누워있다가 큰 숙취로 인해 새벽에 깬 적이 있다. 그 때 친구네 집엔 망고주스가 있었는데, 자기 직전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입이 텁텁할 즈음 그 망고주스가 얼마나 맛있던지.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지 뭐람. 그 날 이후 술 먹은 다음 날 아직 술 기운이 느껴질 땐 망고주스를 찾았다. 몸 안에 있는 술들을 몽땅 다 색도 맛도 진한 망고주스가 덮어버리는 느낌이랄까. 3. 망고가 단 줄도 몰랐던 그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망고를 가질 수 있을까 ..
*확신 살면서 확신이 든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순간들을 여러 번 겪어왔다. 확신도 기대의 일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함부로 확신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았다. 괜히 기대의 감정을 넘어 확신까지 가게 되면 정말 큰 실망이 다가올까 봐 말이다. 겉으론 확신에 가득찬 척, 담담한 척, 떨리지 않는 척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동공 지진이 일어났는지. 특히 사람의 마음속은 더욱 알 수 없고, 상대방 말고 나조차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확신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와 더불어 확신한다는 사람의 말도 믿기가 어렵다. -Hee ---------------------------------------------------------------------------..
*조명 1. 내 시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라식이나 라섹 등 교정을 위한 수술을 할 만큼의 용기는 없다. 벌써 렌즈를 착용한 지 17년 정도 된 것 같다. 중학교때부터 콘텍트렌즈-하드렌즈를 지나 이번엔 한달용 콘텍트렌즈를 사용중이다. 물론 출근하거나 외출할 때, 운동할 때만 착용하고(러닝할 땐 제외) 집에 오면 무조건 제일 먼저 렌즈부터 뺀다. 눈이 나쁜 사람들은 다들 알다시피 렌즈나 안경을 착용한 직후엔 시력이 평소보다 순간 더 나빠진다. 안그래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눈이, 렌즈를 빼고 나면 더욱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갖고 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조명마저 어두워버리면 너무 답답해진다. 그래서 집에선 웬만하면 항상 밝게 불을 켠다. 누군가는 불을 끄고 미미..
*사라진 것들 꼭 필요한 것들도 사지 못하게 했던 한 줌의 걱정 이제는 이름도 까마득한 내 첫 에프바이 페라가모 향수 수다도 떨고, 계획도 세우고, 팔찌도 만들던 우리 동네 카페 늘 현명한 선택만 할 것만 같았던 어떤 삶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밤 속도를 더 줄일까 말까 고민했던 페달 밟던 순간들 찬 바람이 불 때쯤 동네에 사는 친구와 만나 함께 붕어빵을 먹던 순간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욱 관심이 없었던 희대의 라볶이 레시피 제일 깡말랐었을 시절에 신나게 주문했던 밀크팥빙수 홍대에서 이젠 먹을 수 없게 된 히비의 앙카케 가을에 연차를 내서라도 꼭 가야했던 프로젝트 온더로드 고작 한 번이지만 진한 추억으로 남은 나의 작은 카페 특히 돈 앞에서 크게 들렸던 머리 굴리는 소리 ..
*닭죽 집에서 엄마가 삼계탕까진 아니고 닭을 통째로 삶은 후 김이 조금 빠지면 꺼내서 살을 발라주셨다. 그러면 나랑 동생은 소금과 후추, 그리고 깨를 섞은 종지에 닭고기를 콕 찍어서 야금야금 먹기 바빴지. 그리고 양이 적은 나는 닭고기가 맛있어도 절대 배부를때까지 먹지 않았다. 왜냐면 마지막에 남은 닭고기를 잘게 찢어서 끓인 닭죽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지. 집에선 닭죽 먹고 싶다고 엄마한테 한 마디만 지나가듯이 해도 엄마는 그 말을 기억하곤 그 날 저녁이나 다음날에 생닭을 사오신 후 뚝딱 해주셨다. 근데 자취한 이후로 닭죽이 생각나서 밖에서 사먹으려고 하면 왜 이렇게 발이 안떨어지는지. 본죽에 가도 삼계죽은 비싼 죽에 속했다. 그러다보니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엄마밥은 언제나 최고다. 아빠와 동생은 종종 ..
*미니멀리즘 1. 이제는 잠깐 머물다가는 자리가 아닌 정말 내 공간, 내 자리들을 만들어보기 2. 인스타그램에서 한창 미니멀리즘이 유행했을 때 몇 개의 계정을 팔로우 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집은 정말 새-하얀 인테리어에 아일랜드 바 위, 식탁 위, 책상 위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라. 난 속으로 '음. 이런 걸보고 미니멀리즘 삶이라고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고, '위에 아무것도 없으니 먼지 닦긴 되게 쉽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 옆에 누구는 '와 다 하얗네. 되게 정신병원 같다'라고 말했다. 3. 난 솔직히 조금씩 미니멀리즘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화장대를 보면 되게 비슷한 색의 립스틱과 섀도우들이 즐비하고, 밤에 바르는 나이트크림과 선크림만해도 최소 2개 이상이다. 이젠 화장..
*강요 어느 누구도 슬픔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조바심이라면 조바심이고, 노파심이라면 노파심으로 강요되어졌을 뿐. 셀프강요로 인해 나는 고비를 넘긴 것 같다. 밤마다 그리워서 우는 일도 없으며,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간절해지지도 않았다. 여긴 다행스럽게도 계절의 장난도 없어 감정에 쉽게 지배당하지도 않는다. 물론 다달이 부-욱 찢어버리는 달력과 매주 넘어가는 다이어리 덕분에 가을을 실감하고, 추워졌다는 친구들과 가족들의 말, 그리고 SNS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줄 뿐. 계절의 관성때문인지, 무의식 중에 계절을 학습한 덕분인지 몰라도 네일아트샵에서 색을 고를 때 쨍한 여름 색들은 외면하고 약간 어둡고 가을무드가 느껴지는 색을 고르는 내가 재미있다. 아 또 한 가지, 쇼핑몰에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