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1. 그놈의 자격. 내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다면 곧이 곧대로 듣지 않을 자격도 있다. 2. 마음대로 연락할 자격이 있다면 마음대로 대답하지 않을 자격도 있다. 3. 그 신발은 싫다고 몇번을 말해도 눈치를 못채고 있는 건지,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말하다보면 말하면서 기분이 나쁜 내가 싫어서 이내 입을 다문다. -Hee --------------------------------------------------------------------------------------- 도란도란 프로젝트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brunch.co.kr/@doranproject http://..
*얼룩 1.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벽증이다. 내 블라우스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 내 하루에 대부분은 키보드를 칠 일이 많은데, 그때 내 옷 팔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이 너무 싫다. 닿지 않게 하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위에 무조건 사무실용 긴 소매 겉옷을 입거나 팔만 끼우고 키보드를 친다. 손목을 아예 들고 칠 수는 없으니. 그 향수를 뿌린 팔목 안쪽이 어딘가에 닿는 게 너무 싫다. 소매가 짧은 옷을 입어서 팔목이 그대로 드러나 차가운 책상에 닿는 것이 싫고, 긴 소매 옷을 입더라도, 그 긴 옷조차 닿는게 싫다. 그렇다고 내 책상은 항상 닦아서 먼지 한 톨 없을 텐데, 그래도 싫다. 에어컨이 추워 가져다놓은 사무실용 옷은 내 팔목과 그날 입은 내 긴 옷소매를 지켜주는 데에도 쓰인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
*구겨지다 1. 다림질을 못하겠다. 어떤 블라우스를 세탁기에 빨면 매우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졌던데. 다림질 그게 뭐 어렵냐 하겠지만 내겐 어려워.. 그래서 구겨진 블라우스 3-4개를 집 앞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도 필요 없고 그냥 다려달라고만 했는데 다행히 다려준다고 했다. 세탁소 직원이 나보고 옷걸이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집에 옷걸이 많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게 큰 실수였다. 약속한 날 블라우스들을 찾으러 가보니 곱게 다려진 블라우스들이 큰 세탁 봉투 안에 접혀져서 (^^) 밀봉이 되어있었다. 집에 와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 블라우스를 꺼내었더니 역시.. 몸통 부분은 접혀진 모양대로, 팔 부분들은 또 다른 모양대로 구겨져있었다. 헤헤. 난 왜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긴 걸까.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진..
*침대 1. 사실 그 침대에 누워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부모님은 내 침대를 정돈하신다. 철마다 이불을 바꾸고, 동생 전기장판 바꿀 때 내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도 덩달아 바뀐다. 2.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훨씬 쉽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아는 것이 힘이 될 땐 정말 엄청 많은 것을 알아야 힘이 되는데,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땐 조금만 몰라도, 저것만 몰라도, 이 사실만 몰라도 약이 될 때가 많다. 3. 침대의 사이즈가 어떻든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싱글이면 충분) 근데 퀸사이즈, 킹사이즈를 쓰다보니 큰 사이즈가 좋긴 좋네.. 4. 어느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미처 묶은 머리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워버려서 머리가 배겼다지. 그래서..
*자취 20대가 되면 한 번 쯤은 자취에 대한 로망,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 독립에 대한 로망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런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처음 밖에서 살 게 된 건, 21살때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춘천에 가서 디자이너언니랑 같이 살게 되었을 때였다. 작은 원룸이나 투룸이 아닌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고, 온전하게 혼자만 사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딱히 자취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그 곳은 어떤 가구를 사다 들여놓거나, 집을 꾸미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직장 주변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을 때도, 정말 실용적인 용도 그 ..
*염증 1. 말레이시아에 와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입 안 어디든간에 염증이 먼저 난다. 생리 직전에도 나고, 잠이 부족할 때도 나고, 술을 자주 마셨을 때도 나고, 그냥 피곤할때도 나고. 입에 염증이 생기면 일단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신호인 걸 깨닫고는 따뜻하게, 편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고 과일도 많이 먹고, 침대에도 일찍 눕는다. 그리고 내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입 안에 바르는 연고가 놓여있다. 저 연고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산 약이였는데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뭔가 불안하다. 다른 약들은 다 깊은 서랍 속에 놓여 있는데 저 연고만은 내가 마치 부적처럼 보기만해도 안심이 된달까. 2. 상처를 주고, 실망을 주고, 미움을 사고. 내 안에 곪아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가만..
*바라만 봐도 1. 종종 살다보면 바라만 봐도 귀여운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자꾸 귀여운 모습들을 더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사랑스럽고 오래 보고 싶어서 자꾸만 초등학생처럼 시비걸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 영원히 귀여움을 잃지 말길- 2.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예쁜 잔에 커피가 나오면 마시지 않아도 배불러 오늘 마침 딱 그랬거든 진짜 인생 통틀어 가장 예쁜 커피잔과 커피잔 받침이였어 차가운 라떼를 시키려고 하다가 그냥 따뜻한 라떼를 주문한 것이 천만다행이였어 내가 그 커피잔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야 3.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좋은 점은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풍경을 한도끝도없이 볼 수 있다는 것. 맑고 푸른 하늘, 초록초록한 잎이 잔뜩 달려있는 나무들 따위 말이야. 적어도 내겐..
*먼 사이 1. 가까이 붙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서로가 한없이 외로워지지. 외롭다고 생각하지. 특히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성격, 성향 등의 차이로 갈등이 생길 때. 그땐 아무리 착 달라붙어있더라도(사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손을 내밀어도 잡아지지 않을 것처럼 마음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지. 그 순간을 견디면서도 우리는 외로움을 묵살했고 그 시간을 버티면서 그렇게 인연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 2. 가산에서 회사를 다녔을 때 출근하기 전 매일같이 영어학원에 갔었다. 당시 중급반 선생님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지만(한 살 많은 언니였지)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고, 배우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려웠었다. 항상 그 선생님은 날..
*계획 1. 완벽한 계획이랍시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계획 속에 날 제멋대로 넣어두고, 왜 자신의 계획대로 하지 않느냐며, 되려 뭐라고 하는 그런 멋없는 사람들. 나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야기 해 본 적은 있는지. 내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나 있는지. (사실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거절할 것은 뻔했겠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의 계획 속 나는 낯설다. 꼭, 이 책 다 읽고 방청소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방청소하라고 잔소리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2.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하기. 누군가 떠오른다면 바로 연락해보기.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꼭 초콜릿 사가기. 이번 주말에는 로컬 친구들과 저녁 먹기. 눈여겨봤던 카페 가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와 양치만 한 후 머리 질..
*시간 1. 시간 참. 내가 아는 언니는 벌써 40대가 되어서 40대 기념으로 여행을 갔다 왔고 아직도 중학생 같은 동생은 30대가 되었어 30대가 된 동생은 벌써(는 사실 아니지) 결혼(해도 무방한 나이긴 하지) 얘길 꺼내고 가족들은 애지중지 생각하는 동생을 보내기 싫어해 과거에 날 붙잡기 위해 먼 길을 쫓아왔던 한 남자친구는 벌써 애가 둘이고 함께 강의실에서 웃던 귀여운 후배는 브라이덜샤워를 하고 있네 반 년 전 뉴욕에 같이 간 친구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코로나로 얼룩진 뉴욕을 그리워하고 있고 추억은 힘이 없다는 너의 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들은 잊혀지고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은 해가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휘해 저 멀리 메트로폴리탄에서..